외국여행에 패키지로 간 경험은 있지만 국내 패키지여행은 처음이라서 어떨까 싶었다. 하지만 관광호텔 2박에 왕복 항공료를 포함해서 이만한 여행요금이라면 많이 싼 것이라는 친구의 말에 솔깃해졌고 또 전국의 온천을 답사하고 있는 나로서는 제주의 온천답사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명분을 만들어서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대한항공 노조파업의 여파인지 빈 자리가 하나도 없는 아시아나 여객기가 부산 김해공항을 이륙한 것은 예정시간보다 20분이 늦은 오후 4시 10분이었다. 개찰이 지연되기에 탑승구 앞에 서 있는 직원에게 물었더니 제주 갈 비행기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지체된다는 것이다.
제주공항에 내리니 현지 가이드가 이름 적힌 표지판을 들고 대기하고 있었다. 부산 여행객은 총 10명으로 8명의 단체여행객은 K호텔에 머물고 나는 S호텔로 가이드가 안내를 한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여니 확 트인 제주 앞바다가 보인다. 눈발이 휘날리는 바다는 바람이 센지 흰 파도가 끊임없이 방파제에 부딪치며 흰 포말을 그려내고 있었다.
약속한 아침시간에 봉고형 미니버스가 호텔 앞에 섰다. 10명의 부산 여행객을 모두 태운 차는 눈과 비가 함께 내리는 미끄러운 눈길 위로 위태위태하게 서행한다. 반대 편 차선에서는 눈길에 미끄러져 부딪친 두 승용차가 보인다. 가이드가 말하기를 이런 날에는 작은 차로 관광이 불가능하므로 대형 버스 편을 주선해 준단다.
용두암 버스주차장에 도착하니 대형 관광버스가 대기하고 있다. 우리 일행과 그리고 다른 여러 관광객 30여 명이 한 팀이 되었다. 우리처럼 사정이 변경된 관광객과 개인적으로 온 관광객 등을 포함해서, 일정한 관광코스를 정해 매일 운행하는 시스템이 짜여져 있는 모양이다.
처음 도착한 관광지가 중국 기예단이 공연하는 해피랜드. 대개 20살 미만의 중국 어린이들이 펼치는 여러 가지 묘기, 그 중 둥근 철망 안에서 7대의 오토바이가 함께 질주하는 묘기가 볼만 하다. 이 어린 단원들은 중국 기예학교 학생들로 6개월마다 선발 교체되어 들어온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선택된 학생들로 긍지와 자부심이 대단하고 또 상당한 대우를 받고 있어서 중국학생들 사이에는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공연을 마치고 모두 나와 마지막 인사를 하는 기예단원들에게 우리나라 관람객들이 눈물을 글썽이며 돈을 주는 광경을 쉽게 볼 수 있다. 그것은 옛날 우리나라 서커스 단원 중에 어린 아이들이 매 맞으며 기예를 배우고 또 굶주리고 천대받았다는 전설 같은 옛 기억들을 떠 올린 때문이 아닐까. 옛 기억의 잔재가 현실을 올바르게 볼 수 없게 하기도 하니까.
서부산업도로를 따라 다음에 들린 곳은 분재예술원. '생각하는 정원'이라는 또 다른 이름이 붙은 이 곳은 성범영씨가 황무지와 다름없는 땅을 1968년부터 개간하여 나무를 심고 바위를 깎고 언덕을 쌓고 연못을 파고 그리고 분재를 기르면서 오늘날 대단한 정원으로 가꾸어 놓았다.
이 곳 안내원이 이 정원을 방문하는 사람에게 '나무에게 배우는 철학' 이라는 제목으로 약 10분 간 설명을 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 분재원은 식당을 겸하고 있는데 입장료에 식사요금이 포함되어 있다.
점심식사 후 정원을 한바퀴 돌았다. 자연미도 좋지만 인간의 노력이 절절이 베어든 이런 인공적인 아름다움도 사람을 감탄하게 만드는구나. 연못이 있고 인공폭포가 있는 옆 귀퉁이에 차를 파는 휴게소가 있다. 처음 이름을 들어보는 '댕유지차'를 한 잔 마셔본다. 맛이 좋다.
분재원 관람을 마친 후 나는 다음 관광코스인 관광농원으로 떠나는 단체관광버스를 타지 않고 콜택시를 불러 산방산온천을 찾았다. 택시요금은 거리(km)요금이 아니라 정해진 요금을 받았다. 택시 기사는 "2만 원은 받아야되는데 1만5000원만 받겠다고 선심을 썼다. 미터기에는 7000원이 표시되어 있었다.
이 온천은 2005년 3월에 문을 연 제주도 최초의 온천이다. 남제주군 건축상을 받았다는 온천건물은 겉모양이 특이한 개성미를 나타내고 있다. 2층 온천탕의 지붕은 유리로 시공되었다고 한다. 건물의 오른 쪽에 마치 박쥐가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 형상의 산이 보이는데 단산이다. 왼편에는 산방산이 우뚝 서 있다.
이 곳 온천수는 유리 탄산가스를 함유한 탄산천으로 우리나라에서 그 함유량(1452㎖)이 최고로 알려져 있다. 온천수온이 31℃이므로 조금 차다는 느낌을 주지만 약 5분 정도 있으면 살갖에 탄산기포가 촘촘히 들어붙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온몸이 따뜻해지기 시작한다. 이 탄산가스가 피부의 모세혈관을 자극하여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한다고 알려져 있다.
내부의 온천시설은 특이할 만한 것이 없다. 보통 휴게실이나 수면실을 온천탕 밖 탈의실 옆에 두는데 이 곳은 욕탕이 있는 내부에 넓은 휴게실을 두어 수면도 취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아쉬운 점은 시공할 때 욕탕 깊이를 필요 이상으로 깊게 만들어 이용하는데 불편할 뿐 아니라 온천의 낭비를 초래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온천욕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또 날씨가 변덕을 부린다. 비가 내리는가 싶더니 금세 눈발로 변한다. 그러다가 잠시 햇살이 비치기도 한다. 이 곳에서는 시외버스가 다니지 않는단다. 계산대의 아가씨에게 부탁하여 모슬포까지 갈 콜택시를 불렀다.
제주도청 홈페이지에서 찾아보면 제주도 해안일주도로를 동과 서로 나누어 20분 간격으로 시외버스가 다니는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런데 현지 사정은 그렇지가 않다. 배차시간이 40분 이상 느려지고 또 다니는 길도 해안도로가 아니라고 한다. 시대가 바뀌어서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면 홈페이지의 자료도 수정해야 되지 않을까. 30여 년 전 처음 내가 제주도를 찾았을 때 해안도로를 따라 수시로 다니는 시골버스를 타고 여기저기를 구경 다니던 시절이 그립다.
모슬포에서 묵고 있는 호텔로 올려고 제주시행 시외버스로 갈아탔다. 제주 할머니들이 운전기사와 주고받는 걸쭉한 제주 사투리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처음으로 제주에 여행 온 느낌을 실감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