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기다려도, 기다리지 않아도 온다고 노래했던 시인 이성부는 고향이 온통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절망했다.
"나는 싸우지도 않았고 피흘리지도 않았다./ 죽음을 그토록 노래했음에도 죽지 않았다./ 나는 그것들을 멀리서 바라보고만 있었다."('유배시집5'에서) 진실과 허위, 정의와 불의, 삶과 죽음 따위의 가치가 뒤바뀐 얼어붙은 시대에 산다는 것이 숨막히기만 했다.
산은 시인에게 다시 시를 돌려주다
광주의 진상은 언론에 의해 '빨갱이'와 '폭도'의 난동으로 매도됐다. 언어의 힘이 무기력하기만 했고, 언어가 역사적 진실을 감추는데 앞장서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지금까지 써왔던 시도 자신을 떠나고 있는 듯했다. <우리들의 양식>에 수록된 자신의 대표작을 다시 읽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워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벼'에서)
어느 날 그에게 산이 다가왔다. 작품활동을 중단하고 80년 가을 자신의 몸에 회초리를 대며 산행에 나섰다. 그 산에는 사람의 역사가 있고, 사람의 삶과 풍속, 인문, 사상, 언어가 있음을 발견했다. 사회구조의 부조리와 폭력에 대한 절망, 자기학대와 죄의식이 역사의 상처와 만나면서 어떻게 제자리를 찾는가를 성찰하기 시작했다.
그 산은 시를 버리고 산행에 몰입했던 시인에게 다시 시를 되찾아 주었다. 80년대의 끝자락을 붙잡고 8년 만에 나온 그의 다섯번째 시집 <빈 산 뒤에 두고>(1989), 이어지는 <야간산행>(1996)에 실린 시들은 산 속에서 그가 되찾은 언어였다. 시를 버리고 산에만 매달렸던 그가 산으로 말미암아 다시 시를 돌려받게 된 것이다.
"이제 비로소 시작이다/ 가로막는 벼랑과 비바람에서도/ 물러설 수 없었던 우리/ 가도 가도 끝없는 가시덤불 헤치며/ 찢겨지고 피흘렸던 우리/ 이리저리 헤매다가 떠돌다가/ 우리 힘으로 다시 찾은 우리/ 이제 비로소 길이다"(<야간산행>의 서시 '우리 앞이 모두 길이다'에서)
<야간산행>에 이어 세상에 나온 '내가 걷는 백두대간'의 첫 번째 시집 <지리산>(2001)과 두 번째 시집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린다>(2005)는 이성부 시인이 비로소 역사의 벼랑에서 삶의 문학을 일구어 간 시편들이다. 이성부 시인을 떠올릴 때마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던 '고향 광주에 대한 부채의식과 그에 따른 절필, 그리고 산으로의 탈출'로 이어지는 자학의 굴레도 여기서는 마침표를 찍은 것으로 보인다.
'내가 걷는 백두대간'의 부제가 붙은 <지리산>과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린다>는 이성부 시인이 8년 동안 690km의 백두대간을 오르내리면서 산행 체험, 대간 주변의 역사, 문화, 사람의 삶을 모두 166편의 시로 담아낸 시집이다.
그의 시편들은 산행마다 하루 10시간 이상씩 고난의 행군을 보여준 백두대간 종주의 발자취다. 백두대간 마루금을 걷는 길은 시인의 표현을 빌면 우리 땅의 등뼈를 밟는 산행이다. 백두산에서 뻗어내려 허항령, 두류산,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두타산, 태백산, 소백산, 속리산, 추풍령, 덕유산, 육십령으로 이어지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끝맺는 한반도의 혈맥이다.
그는 지리산에서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지만, 산은 낮은 곳에서 위로 치닫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이다. 지리산에서 출발해 단 한번도 물을 건너지 않고, 능선으로만 걸어 백두산에 닿는 것이 이성부 시인이 소망하는 인생길이다.
"물은 아래로 떨어지고/ 산은 위로 치솟는다/ (중략) 사람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지/ 산에 올라 산줄기 혹은 물줄기/ 바라보면 잘 보인다/ 빈 손바닥에 앉은 슬픔 같은 것들/ 바람소리 솔바람 소리 같은 것들"(서시 '산경표공부' 중에서)
백두대간을 밟으며 만난 역사 그리고 삶
이성부 시인은 백두대간을 밟으면서 산에 얽힌 역사뿐만 아니라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잔잔하게 시로 빚어냈다.
그가 밟는 산에는 우리네 삶처럼 유난히 사연이 많다. 능선과 계곡들에 서려 있는 역사의 상처들과 만났을 때는 그 아픔을 시인의 가슴으로 받아들인다.
"승리에 굶주린 얼굴들을 보았습니다/ 가쁜 숨 몰아쉬며 해쓱하게 아름다웠습니다/ 미처 말을 못해도 내 볼 가까이에 닿는/ 착하고 힘겨운 눈빛들 나는 다 알아차렸습니다/ (중략) 그렇게 몇해 전 젊은 그대들과 나도 하나였습니다"('고운 얼굴들 더 많이 살아납니다'에서)
빨치산과 토벌대의 대립, 이념의 차이를 화해로 변화시키기도 한다. 역사의 고통을 가슴에 안고 잠을 못 이루고 아파하는 시인은 깊은 연민과 사랑을 가지고 격렬했던 시대와 인물들을 위로한다. 때로는 잘못된 역사를 서둘러 봉합한 이 시대를 향해 절규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산에 숨은 사람들은/ 살아서 내려가야 할 길이/ 주검으로도 내려가지 못한다는 것을 보았다/ 하나씩 둘씩 그렇게 쓰러져서/ 젊음은 흙이 되고 산이 되었다"('젊은 그들'에서)
"골짜기 에워싼 자기 나라 군인들의 총질에/ 그 여린 사람들 모두 숨을 거두었다/(중략) 그 골짜기 파헤쳐 유골들을 맞추어보니/ 어른 남자 뼈 일백아홉 명/ 어른 여자 뼈 일백팔십삼 명/ 어린것들 뼈 이백이십오 명/ 저 눈망울 선한 아기들도 빨갱이라고?/ 이러고도 우리나라 여기까지 왔으니/ 참 요행타!"('거창 땅을 내려다 보다'에서)
산행에서 만난 선인들의 삶도 시인에게는 특별하다. 자기성찰의 거울로 삼으면서 동시에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길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의 시집에서는 남명 조식, 최치원, 김일손, 청허당(서산대사), 도선국사, 김개남, 매천 황현, 주세붕 등 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오늘의 어지러운 세상을 풍자하고 칼날을 세우는 시인 자신이 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산봉우리 쳐다보며/ 하늘이 울어도 산은 울지 않는다는/ 크고 넉넉한 마음/ 벼슬길 마다하던 그 까닭 알겠거니"('남명선생'에서)
역사는 내일을 비추는 오늘의 거울이다. 늘 현재와 겹쳐져 내일로 가는 길을 닦아 준다. 이렇듯 시인은 산행에서 역사를 만났다. 자기 자신도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음을 보면서, 그 길이 앞으로도 늘 '새로운 사연들'로 가득 차 더 큰 역사를 만들어 갈 것임을 시인은 믿고 있다.('그 산에 역사가 있었다') 그의 시는 역사와 현실이 넘나들고 사람과 자연이 소통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성부만이 갖고 있는 세계일 수 있다.
'내가 걷는 백두대간' 연작시집에는 산을 통해 얻은 깨달음과 자기성찰이 빛난다. 산 속에서 길을 잃거나 그렇지 않거나 오르막과 내리막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인간은 성숙해진다는 진리가 평범하지만은 않다. 시대의 무게를 감당하는 방법도 솔직하다. 우리네 인생살이를 보는 듯하다.
"저를 낮추며 가는 길이 길면 길수록/ 솟구치는 힘 더 많이 쌓인다는 것을/ 먼발치로 보며/ 새삼 나도 고개 끄덕이며 간다"('저를 낮추며 가는 산'에서)
"산을 배우면서부터/ 참으로 서러운 이들과 외로운 이들이/ 산으로만 들어가 헤매는 까닭을 알 것 같았다/ 슬픔이나 외로움 따위 느껴질 때는 이미/ 그것들 저만치 사라지는 것이 보이고/ 산과 내가 한몸이 되어/ 슬픔이나 외로움 따위 잊어버렸을 때는/ 머지않아 이것들이 가까이 오리라는 것을 알았다"('산을 배우면서부터'에서)
산행은 문학과 삶을 완성하는 길
| | | 이성부 시인은 누구? | | | |
| | ▲ 이성부 시인 | ⓒ창비 | | 이성부 시인(63)은 전남 광주가 고향이다.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62년 <현대문학>에 '열차' 등으로 추천 완료됐다.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우리들의 양식'이 당선 되었고, 시집으로 <이성부 시집>(1969), <우리들의 양식>(1974), <백제행>(1976), <전야>(1981), <빈산 뒤에 두고>(1989), <야간 산행>(1996), <지리산>(2001),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린다>(2005) 등이 있다. 산문집으로는 2002년 <산길>이 있다. 1969년 <제15회 현대문학상> 수상, 1977년 <제4회 한국문학 작가상>, 2001년 <대산문학상>을 수상하였다. | | | | |
진부령에서 시인의 '내가 걷는 백두대간' 연작은 끝났다. 가로막힌 북녘땅 봉우리를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은 한없이 북으로 달려가고 있었으리라. 그는 "생전에 북쪽 백두대간을 밟아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반드시 통일이 되고 백두산까지 산길이 트일 날은 머지않았음"을 확신하고 있다. '나는 아직도 그리움의 실체를 알지 못하여, 시와 산과 삶을 포기할 수 없다'는 시인의 아름다운 산행은 이제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이성부의 문학이 완성되는 길은 산으로 가는 길과 같다. 그 산길은 우리가 가야할 삶의 길이다. 첩첩산중처럼 서로 얼싸안고 가야 하는 길이다. 그 길이 순탄치만은 않다.
그러나 어렵게 가는 길목이더라도 스스로 깨달음을 얻고 감동을 만나면 아름다운 법. 많은 고난과 어려움을 거쳐 성취된 인생이 아름답듯이, 그런 어려운 과정을 거쳐 비로소 열매 맺는 문학은 아름답다. 그래서 이성부의 산은 인생의 끝점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의 원동력이다.
덧붙이는 글 | <지리산>
- 이성부 시집/창작과비평사/7000원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린다>
- 이성부 시집/창비/8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