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서울도 눈 왔어? 여기는 밤새 눈이 좀 내렸어. 오늘도 대설주의보가 내려졌으니까 좀 서둘러서 내려와야 미끄럽지 않을 거야. 눈이 내릴 때 들어오게 되면 고생할 테니 일찍 내려와."
거의 1년만에 집을 떠나서 서울 나들이 중이었다. 밤새 동생들과 수다를 떨다가 새벽녘에서야 잠이 들었는데 남편은 이른 아침부터 전화로 빨리 내려 올 것을 종용하고 있었다. 단 하루 동안의 아내 빈자리가 서운해서가 아니라 불편해서 빠른 시간 안에 나를 불러 내리려는 남편의 속마음이 훤하게 보이는 전화였다.
"일찍 못 내려가. 오랜만에 올라 왔는데 동대문 시장도 한번 둘러보고, 친구들도 만나봐야지."
남편의 전화를 이렇게 끊고는 아파트 숲이 끝없이 펼쳐진 창 밖을 내다보니 서울 하늘은 그저 맑기만 할 뿐 눈이 내릴 어떤 징후조차 없었다.
동생이 일터로 가는 시간까지 백화점을 돌아다니면서 크리스마스에 아이들에게 줄 선물도 사고 시골살이를 하느라 뒤떨어진 패션 감각도 살리기 위해 열심히 아이쇼핑도 했다.
점심을 먹고 나자, 동생들도 각자 일터로 갈 시간이라 어쩔 수 없이 쇼핑을 더하고 싶은 욕망을 누르고 시골행 버스를 타야 했다.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지난 밤 못 잔 잠이 스르르 밀려오기 시작했다.
눈을 떠보니 버스는 공주 근방이었는데 창 밖에는 회색 빛 하늘이 내려와 눈발이 벚꽃처럼 분분하게 날리고 있었다. 부여에 가까워질수록 그 눈발이 더 거칠고 굵게 날리는 것이 터미널 근처에 세워두고 온 차를 끌고 두 고개를 넘어서 집까지 무사히 들어갈 일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밤새 세워둔 차에는 한 뼘 가까이 눈이 쌓여 있었고 앞 유리는 눈이 딱딱하게 얼어붙어서 와이퍼도 작동하지 않았다. 서울에는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던 눈이 부여에는 그렇게 쌓였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벌써 날이 저물어 어두운데 눈보라치는 길을 운전해서 집까지 가는 일이 까마득해지기 시작했다. 더구나 집까지 가는 길목에는 눈만 오면 빙판길이 되는 고개가 두 개나 버티고 있었다. 그 중 한 고개를 피해 가려면 멀리 돌아가는 길을 택해야 했다.
읍내를 벗어날 때까지는 차량들도 서로 서행을 했고 눈도 쌓이지 않아서 그런 대로 운전을 할 만했지만 외곽 도로에 접어들자 눈발이 더 심해져서 눈앞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그러다보니 길을 잘못 들어서 그 와중에도 차를 되돌리는 일까지 생겼다. 평소에 항상 다니던 길에서 그런 실수를 하게 된 것은 순전히 눈 때문이었다.
차를 돌려서 눈 속에서 다시 집으로 가는 대장정에 올랐을 무렵이었다. 견인차 한 대가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며 내 차를 앞서서 달려 나갔다. 어딘가에서 눈길 교통사고가 난 모양이었다. 갑자기 사고에 대한 두려움으로 팔다리에 힘이 쭉 빠지는 것이었다.
"어디쯤이야?"
남편의 전화였다.
"눈 때문에 도저히 못 갈 것 같아. 근처 찜질방에서 자고 눈 걷히면 내일 들어 갈까봐."
"스노타이어로 갈아 놨으니까 그냥 살살 와. 괜찮을 거야."
남편이 그 상황이라면 나는 아예 운전해서 집에 들어 올 생각도 말고 적당한 곳에서 눈을 피한 다음에 들어오라고 했을 텐데 남편에게 그런 아량은 기대할 수가 없었다.
"이 눈 속에 백중재를 넘어 갈 수 있을까?"
백중재는 우리 동네로 들어가는 관문에 해당하는 고개의 이름으로 백 명의 사람이 무리를 지어서 넘어가야 산적과 호랑이의 피해를 입지 않는다는 이름처럼 높고 험한 고개였다.
"낮에 다 녹았던 길이라서 그렇게 미끄럽지는 않다니까."
비록 눈보라가 치는 길이라고 할지라도 전진밖에는 길이 없는 상황이었다. 창 밖은 어디쯤 왔는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여전히 일기가 나빴다. 이미 도로는 눈이 10여cm는 쌓인 상태였다.
갑자기 바퀴가 내가 핸들을 잡고 있는 방향이 아닌 반대로 움직이더니 차가 기우뚱거리며 중심을 잃었다. 핸들을 바로 잡으며 중심을 바로 잡으려 애쓰는 순간 차 뒤 범퍼에서 둔탁한 충돌 느낌이 왔다. 뒤 따르던 차가 같이 미끄러지면서 내 차를 받은 것 같았다. 못내 두려워하던 상황이 벌어진 것이었다.
간신히 차를 바로 잡아서 갓길에 세워놓고 내려서 보니, 뒤 차 운전자도 내려서 연신 미안해 하며 내 차의 범퍼를 살피고 있었다. 뒤 차 역시 느린 속도로 왔기 때문인지 충격의 강도가 그리 크지 않아서 다행히 내 차는 별다른 이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시동도 여전히 걸려 있고 트렁크도 잘 열렸다.
그 와중에도 눈발이 얼마나 날리는지 추돌을 한 운전자의 얼굴은커녕 차의 번호판도 식별이 되지 않았다. 그럴 때는 피해 차가 먼저 사고 차를 안심시켜서 어서 빨리 갈 길을 가게 해주는 것이 도리였다. 고맙고 미안하다는 뒤 차 운전자의 인사를 귓등으로 들으며 다시 차에 올랐다.
얼마쯤 거북이걸음으로 달리고 있을 때 이번에는 차들이 도로에서 꼼짝달싹도 하지 않고 멈춰 있는 상황이 발생했다. 정말로 사고가 난 모양이었다. 줄지어 서 있는 차량의 앞머리에는 아까 지나갔던 견인차가 있었고 경찰차의 경광등이 어둠 속에서 깜박이는 것이 진짜 사고였다.
30분 정도 지나자 사고가 수습되고 부서진 승합차 한 대가 견인차에 끌려 나갔는데도 밀린 차들이 움직이질 않았다. 가만히 보니 운전자들이 내려서 바퀴에 체인을 감고 있는 것이었다. 내 차에는 체인도 없을 뿐더러 체인이 있어도 감을 줄도 몰랐다. 운전 경력이 10년이 넘었지만 스노체인은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었다.
눈 길 위의 운전자들이 체인을 감는 것을 막막하게 바라보며 다시 눈길에 오르자 눈앞에 거대한 눈 언덕이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차들에 의해 매끌매끌하게 다져진 내리막길을 안고 있는 오르막의 한 가운데에 이른 것이었다. 평소에 항상 다니던 길에는 분명코 없었던 언덕이었다. 차를 세우고 내려서 살펴보니 평소에는 언덕이라고 여기지도 않았던 길이 눈이 쌓이자 한계령만큼이나 미끄럽고 위험하게 변신을 한 것이었다.
그 내리막길을 무사히 내려갈 수 있을지 가늠을 하기 위해 살펴보는 사이에 한 경찰관이 호각을 불며 나타나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제야 돌아보니 내 차 뒤에는 차량들이 줄줄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브레이크는 밟지 마시고 사이드 브레이크를 반쯤 올리시고 천천히 내려가세요. 천천히…."
경찰관은 상냥하고 친절하게 운전 요령을 숙지시켜 주었다.
평소에는 20여분밖에 걸리지 않던 길에서 손에 땀을 쥐고 가는 모험을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길을 잘못 찾아들고 접촉 사고를 당하고 작은 오르막길이 한계령 고개가 되는 판타지 영화 같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집으로 가는 길은 겨우 반을 지났을 뿐이었다. 더구나 이제는 차량 통행도 뜸한 산길을 헤치고 가는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까의 경찰관이 숙지시켜 준 눈길 운전 요령을 마음 속으로 되새기며 하얀 눈만 보이는 산길을 혼자 밟아가는 길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공포였다. 사고에 대한 두려움보다 하얀 길이 벌떡 일어나 내가 운전하는 차를 덮칠 것 같은 상상이 나를 괴롭혔다.
백중재를 오를 때보다 내려오는 길에서는 차가 다시 빙그르르 돌아서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영화의 이미지가 떠올라 다리가 얼마나 후들거리고 가슴이 조이는지 지옥이 따로 없었다.
드디어 모퉁이를 돌면 집이 보이는 곳이 이르자 마을 입구까지 나와서 내 차가 오기를 기다리는 남편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왈칵 가슴이 미어지면서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에베레스트 산맥을 정복한 것 같은 희열이 바로 그 순간인 것 같았다.
대설주의보가 내린 날, 외출했다가 집으로 가는 길에서 겪었던 모험은 평생 못 잊을 기억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