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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내 이름으로 된 내 통장을 만드는 것인데 왜 은행여직원에게 그리 주눅이 들었던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굳이 이유라고 한다면 번번이 만 원 짜리 한 장을 내밀어야 될 것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릴 적. 부엌 쪽문을 열어젖히고 문지방에 턱을 괴고 엎드려 저녁밥 짓는 어머니를 바라보곤 했다. 부엌 한쪽 구석에 단지가 두개 있었다. 하나는 조금 큰 단지였고 하나는 그 단지 반도 안 되는 아주 작은 단지였다.
어머니는 큰 단지의 뚜껑을 열고 쌀을 퍼내셨다. 작은 조롱박으로 한 번 두 번 세 번. 큰 단지의 뚜껑을 닫으신 어머니는 이번엔 작은 단지의 뚜껑을 여셨다. 그리곤 퍼낸 쌀을 한줌 움켜쥐고 그 단지에 도로 담으셨다.
"엄마. 왜 작은 단지에 쌀을 도로 담으세요?"
"저축하는 거야."
"왜요?"
"쌀 떨어질 때를 대비해서 그러는 거야. 옛날 엄마의 엄마들에겐 절미라는 풍습이 있었단다. 그리고 절미단지 하나씩은 다 가지고 있었지. 밥을 짓기 전 쌀을 한 숟가락 따로 들어내 절미단지에 담아 두셨지. 절미단지에 든 쌀로 때로 쌀독에 쌀이 떨어졌을 때 식구들의 허기를 채우기도 하고 때로는 장에 내다 팔아 자식들의 학자금으로 충당하기도 했단다."
"엄마. 그렇게 덜어 내고 나면 식구들 먹을 밥이 모자라잖아요."
"워낙에 없는 살림살이에 어찌 배부르게 밥을 먹어. 그나마 세끼 굶지 않는 것도 다행이라 생각해야지."
대신 어머니는 부엌 천장에 매달아놓은 바구니를 내려 미리 삶아놓은 보리쌀을 한줌 넣어 저녁밥을 짓곤 하셨다.
내가 만든 통장은 어머니의 절미단지와 같은 것이었다. 늘 빠듯한 살림살이였다. 저축은 엄두도 못 낼 형편이었다. 남편은 결혼하자마자 적자로 허덕이던 전기가게를 정리했다. 큰 액수의 빚이 남았다. 결국 우리의 신혼은 빚과 함께 시작되었다. 매달 적잖은 돈이 빚을 갚는데 쓰였다. 당연히 살림살이가 빠듯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문득 생각해낸 것이 어머니가 도로 퍼내던 한줌의 쌀이었고 바로 그 절미단지였다. 그 후 한줌씩 퍼 담았던 어머니의 작은 쌀 단지가 어느 날인가 가득 채워진 것처럼 내 통장에도 만원이 보태어져 이만 원이 되고 또 삼만 원이 되고 또 십만 원이 되었다. 그러나 통장의 잔액은 늘 10만원을 넘기지 못했다.
주머니 돈이 쌈짓돈이라고 들쑥날쑥한 남편의 수입으로 인해 늘 모자란 생활비로 충당하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하긴 그거라도 있어 매번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면 또 다행이랄 수도 있었다. 그때 아귀 맞춰진 10만 원을 찾아 은행 문을 나설 때 막연하긴 했지만 그래도 가슴 설레는 소망을 품었던 기억이 난다.
'언젠가는 이 통장의 잔액이 백만 원이 넘는 날이 올 거야. 아마 그때는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겠지.'
기분 좋은 상상에 손아귀에 쥐어진 10만 원의 얇은 부피가 백만 원 만큼이나 묵직하게 느껴졌던 기억이 생생하다.
작년 이맘때부터이지 싶다. 내 통장의 잔고가 10만 원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어지간히 빚 정리가 되어서 그런지 생활비를 충당키 위해 10만 원을 넘어선 그 돈을 찾을 일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돈이 모이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내게도 비자금(?)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가끔 어머니께서 푸념삼아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돈이 사람을 따라야지 사람이 돈을 따라갈 수 없는 법이라고. 그렇다면 돈이 나를 따라준 것일까.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원고료란 걸 받게 되었다. 물론 큰 돈도 아니고 또 매달 받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따금씩 입금되는 작은 원고료일지라도 유명작가들이 받는 큰 액수의 원고료 못지않게 소중했다. 통장의 잔액은 10만 원을 넘어서고 20만 원을 넘어서고 백만 원의 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가슴 설레며 막연히 꿈꾸었던 소망이 바짝 코앞에 다가선 느낌이었다.
올 봄. 파릇파릇한 새싹이 꽁꽁 언 땅을 비집고 올라와 온 세상에 희망을 잉태시키고 있을 무렵. 나는 화려한 봄을 맞고 있었다.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원고료가 쌓여갔다. 온 세상에 초록의 융단이 깔리기 시작할 무렵. 내 꿈이 이루어졌다.
내 통장의 잔액이 백만 원을 훌쩍 넘어섰다. 4년 전 아귀 맞춘 10만 원을 찾아 은행 문을 나서며 막연히 꿈꾸었던 소망이 드디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날은 2005년 7월5일이었다.
올 8월 일이 없어 쉬고 있던 남편의 축 처진 어깨가 눈물 날만큼 안쓰러웠다. 남편 앞에 거금 50만 원을 내놓았다. 남편에게 보약도 한재 지어 먹였다. 그 돈이 어떤 돈이냐며 남편은 한사코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남편에게 뭔가 해주고 싶었다.
빚 갚느라, 식구들 먹여 살리느라, 또 가까이 계신 양가부모님 보살피랴, 그간의 세월이 남편으로 하여금 얼마나 목을 조였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기 때문이다.
인생이란 게 그런 것 같다. 꿈을 만들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쉼 없이 달리는 세월. 그게 바로 인생인 것 같다. 4년 전 어머니가 끼니마다 따로 퍼내던 한줌의 쌀이 작은 단지를 가득 채웠던 것처럼 만 원, 이만 원 생활비를 쪼개 저금한 돈이 백만 원을 만들기를 꿈꾸었다. 그런 꿈이 있었기에 늘 빠듯한 살림살이가 그리 막막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내 통장에는 거액(?)의 비자금이 있다. 그 비자금이 미끼가 되어줄 두 가지 꿈에 나는 요즘 시도 때도 없이 기분 좋은 웃음을 웃는다.
하나는 양가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가는 것이다. 지금껏 양가 부모님을 모시고 그 흔한 여행한번 다녀오지 못했다. 하여 경비마련을 위하여 적금을 하나 들었다. 매달 12일이면 통장에서 적금이 빠져 나간다. 내년 8월엔 양가부모님을 모시고 가족여행을 갈 것이다.
또 하나는 공부를 하는 것이다. 올 한 해 나름대로는 꽤 많은 글을 썼다. 글을 쓸 때마다 허기가 졌다. 채워지지 않는 뭔가에 나는 늘 배가 고팠다. 밤새 써 놓은 글을 아침에 다시 볼 때 느껴야 하는 그 부끄러움이라니….
소질과 능력의 한계에서 수없이 좌절했던 그 시간들이 내게 배움의 열망을 잉태시켰다. 가슴에 이름표와 손수건을 달고 처음 학교 문을 들어섰던 34년 전 그때 그 꼬맹이가 마흔 셋이 되는 2006년. 대학 문을 부서져라 두드릴 것이다.
2005년의 끝자락에 서있다. 열심히 달려온 한해였다. 비록 작은 소망이었을지라도 꿈을 이룬 한해였다. 그 꿈으로 인해 난 다시 새로운 꿈을 꾼다. 그렇다고 후회와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다. 그래도 기꺼운 마음은 숨길 수없다.
후회와 아쉬움은 새로이 펼쳐질 2006년 한 해 동안 기름진 자양분이 되어 주리라 믿는다. 그리하여 내 년 이맘때 나는 또 꿈을 이룬 황홀경에 빠질 것이다.
이른 아침. 밤새 마당을 덮은 눈이 눈부시다. 눈 위에 부지런한 발자국이 드문드문 찍혀 있다. 누군가 부지런한 하루를 벌써 시작한 모양이다. 그 부지런함을 닮을 수 있는 한해이기를 지금 이 순간 나는 소망한다.
덧붙이는 글 | '2005 나만의 특종'에 응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