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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공자는 스스로 명을 재촉하는군.”

어둠을 뚫고 장내에 모습을 드러내는 인물이 있었다. 문사의에 긴 장포를 걸친 오십대 전후의 인물. 성긴 머리는 주먹 만하게 틀어 올리고, 쥐 눈에 턱이 뾰족한 것이 영락없이 쥐 상이지만 작고 동그란 눈을 영활하게 뒤룩거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좌상(左相) 과(裹)노인?”

백결의 얼굴색이 변했다. 아무리 급하거나 중대한 일에도 여유 있는 태도를 유지하던 백결에게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그만큼 나타난 인물이 상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나타내 주는 모습이었다.

바로 구화산(九華山) 여음곡(女陰谷)에서 유곡을 쫓던 좌상(左相)이란 인물. 그의 뒤로는 상엽(霜葉)이란 인물과 비슷한 체형의 세 명의 사내들과 사십대 중반의 괴이하게 생긴 사내가 모습을 보였다. 상엽과 비슷한 체형의 인물은 좌상이 말했던 상엽의 형제들이 분명했다. 또한 여음곡에서 추혼귀견수 하공량이 담천의에게 경고했던 그 네 명의 인물이 분명했다.

나머지 한 명은 특성을 파악하기 힘든 인물이었다. 그의 얼굴은 온통 크고 작은 상처의 흔적으로 뒤덮여 있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섬뜩한 느낌을 주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진한 살기를 내뿜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야수의 본능을 가졌으나 살기가 극히 절제되어 상대방으로 하여금 그런 기운을 감지하지 못하게 하는 자였다.

“하지만 이제 그 일은 함구해야 할 비밀도,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오. 어차피 다시는 해가 뜨는 것을 보지 못할 사람이 그것을 알면 무슨 소용이 있겠소?”

좌상 과노인은 아주 작은 부채를 접은 채 왼손 바닥에 가볍게 치고 있었다. 부채를 들고 다니는 것은 그의 버릇처럼 보였다. 백결은 고개를 끄떡였다.

“과노인이 나타났으니 나는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구려.”

백결은 좌상 과노인의 능력과 특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모습을 나타냈음은 완벽한 준비를 끝냈다는 뜻이다. 과노인의 말대로 이곳에서 무사히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할지 몰랐다.

“노부는 교주(敎主)께 수차례에 걸쳐 둘째공자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했소. 하지만 교주께서는 다른 복안을 가지고 계셨는지 둘째공자를 중용했소. 물론 둘째공자는 지금까지 아주 잘해왔소. 요사이 들어 아주 중대한 문제를 일으키고는 있지만 말이오.”

“뭐… 그렇다고 칩시다. 헌데 과노인은 어떻게 우리를 따라 왔소?”

“따라 온 것이 아니라 준비하고 있었을 뿐이오.”

과노인은 잠시 시선을 돌려 한쪽에 서있는 모용수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백결에게 돌렸다.

“모용공자는 매우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있고, 감탄할 만한 능력도 가지고 있으나 마음이 너무 여린 게 문제요. 아마 모용공자의 계획대로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렸다 해도 우리는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웠을 거요.”

“과노인다운 생각이군.”

“자… 이제 정리할 때가 되지 않았소?”

과노인은 장내에 있는 인물들을 하나씩 훑어보면서 느긋한 미소를 띠었다. 그러다 시선이 모용수에게 가 멎었다. 그것은 모용수에게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묻는 것과 같았다. 모용수를 최대한 배려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지만 이 일을 시작한 사람이 모용수이니 그 기회를 다시 한 번 주겠다는 의미도 다분히 섞여있었다.

“나는 아직 공력을 끌어올릴 수 없소.”

“공자께서 직접 나서실 필요는 없소. 지금 누구보다 마음이 급한 분은 일곱째 공자이시오. 더구나 상엽과 그 형제들은 매우 성격이 급한 사람들이오.”

일곱째는 전월헌을 말한다. 좌노인의 말이 아니더라도 전월헌은 이미 먹잇감을 아주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담천의에 가 있었다.

“아직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지만 담형에게는 이번 일을 망치게 한 아주 유능한 조력자가 있소.”

“유능한 조력자가 있다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소? 지금 이곳은 칠로단(七路團) 소속 스물네 명이 포위하고 있소. 그 자가 하늘을 나는 재주가 있더라도….”

모용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내 수하 두 명 역시 칠로단의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소. 하지만 그들은 아무런 흔적도 없이 당했소. 더구나 근접해 있음에도 일엽형마저 그를 감지하지 못했소. 담형의 말로는 판단력이 아주 뛰어날 뿐 아니라 매우 참을성이 깊으며 또한 행동이 너무 은밀해 남의 이목을 피하는데 그를 따라갈 사람이 없다고 했소.”

그 말에 과노인의 얼굴에 의혹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하는 듯 했다. 일이 어디서 어떻게 뒤틀려버렸는지 알게 된 것 같았다.

“그렇군. 그랬어…. 그를 계산에 넣지 않은 것은 확실히 노부의 잘못이로군.”

과노인은 작은 부채로 자신의 이마를 톡톡 치면서 중얼거렸다. 그의 머리 속에 담천의의 유능한 조력자가 누구인지 생각해낸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시선을 돌려 전월헌을 보았다.

“전공자께서는 종리추의 시신을 살펴보았소?”

전월헌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나는 그를 죽인 자를 찾는 것이 먼저라 생각했소.”

그 말은 전월헌이 종리추의 시신을 보지 못했다는 의미였고, 과노인은 나직하게 탄식을 불어냈다.

“종리추를 죽인 자는 저 자가 아니오. 그는 아마 무영검에 당했을 거요.”

“우교?”

“노부는 그의 죽음을 의심했었소.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소. 그는 아주 충성심이 강해서 한 번 택한 자신의 믿음을 깨버리는 짓 따위는 하지 않을 사람이오. 노부는 처음부터 그를 염두에 두고 우리 사람을 만들려 했지만 그럴 여지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버린 것이오.”

그는 탄식하듯 말을 이었다.

“그가 충성을 맹세한 담명장군의 아들에게 칼을 겨눈다는 것은 애초부터 그릇된 생각이오. 그 두 사람이 승부를 겨룬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소.”

“분명 살천문에서는 그의 시신을 공개하고 장례식을 치루지 않았소? 우리 역시 확인한 사실 아니오? 물론 그 이후 살천문이 자취도 없이 사라진 것이 이상하게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저 자는 노부의 생각보다 훨씬 무서운 심계를 가진 자로구려. 노부는 잘못 생각했소. 비원…. 비원의 숨은 고수들이 그를 도와줄 것이라 생각했지만 비원에서도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소. 단순히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젊은 사람의 치기라고도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이토록 노부를 혼란스럽게 만들 자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소.”

과노인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소. 균대위를 자신과 따로 활동하게 하고 왜 자신의 모습을 명백히 드러내며 우리의 이목을 집중시켰을까? 균대위의 이대오위의 수장들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그들의 움직임은 이미 파악하고 있지 않소?”

전월헌이 다시 되묻자 과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는 큰 실수를 했소. 저 자는 이대오위의 수장 일곱 명에게 각기 다른 임무를 주었고, 그들 간에도 다른 사람이 어떤 임무를 수행하는지 알리지 말도록 부탁했소.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전공자께서는 짐작하시겠소?”

전월헌은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경천동지할 신산귀묘(神算鬼妙)의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익히 아는 좌노인이 저렇듯 심각하게 말을 하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다. 문제가 발생한 것이고, 그것도 아주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귀하는 내가 감탄할 정도로 똑똑하구려.”

대답은 담천의의 입에서 나왔다. 하지만 그의 얼굴도 그리 밝지 못했다. 그가 혹시나 하고 생각했었던, 그리고 내심 우려하던 일이 발생했음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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