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실학의 대가'인 다산 정약용 선생의 얼을 기리는 다산 문화유적지를 둘러보게 되었다.
일요일이라 오후 5시면 입장마감이라는 것을 잘 알지 못해 생가로 들어서는 문을 잠그기 전 딸아이의 현장답사를 핑계로 겨우 입장할 수 있었다.
실학의 체계를 완성한 대학자이며 일찍이 북학(北學)을 받아들여 백성들의 실 생할에 도움이 되는 것을 만들고자 밤새워 고민했던 당시대의 과학자, 1년에 100편이 넘는 시를 쓴 의욕적인 예술가이기도 했던 정다산.
그의 손과 숨결이 거쳐간 곳이라면 어디나 백성을 아끼는 마음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특히 그는 18년간이라는 긴 유배생활에서도 유명한 <목민심서>(목민이란 고을의 수령이 지켜야 할 지침을 밝히면서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한 저술로서 고을의 수령이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과 갖추어야 할 기본자세을 적어 놓은 책)와 <경세유포>('경세'란 국가제도의 뼈대를 세워 운영함으로써 나를 새롭게 하겠다는 뜻이며 '유포'란 신하가 죽으면서 임금에게 올리는 글이라는 뜻 즉 '경세유포'란 다산의 학문을 결집한 국가개혁론이라고 할수 있다) 등의 책 외에도 500여 권에 달하는 책을 집필하며 붓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또 실학을 학문으로만 남기지 않고 민중의 삶에 실학을 녹여낸 실천의 과학자이기도 했다.
도르레의 원리를 이용해 물건을 들어올리는 '거중기'를 비롯해 드르레의 원리를 이용해서 만든 일종의 크레인과 같은 녹로로는 1803년 창덕궁 인정전 재건공사 때와 1857년 인정전 중수공사 때에도 직접 활용되었다고 한다. 또 배를 이용하여 다리를 만든 한강의 배다리는 백성들이 한강을 건널 수 있도록 했다.
지금처럼 모든 것이 어지러울 때 바른 길을 제시할 수 있는 실천의 학자였던 다산이 남긴 말을 적어본다.
"지식인이란 시대의 환부가 어디이며, 치료를 위해서는 어떤 처방을 해야 할 것인지를 언제나 깨어 있는 정신으로 살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실학운동의 대가로만 기억되는 다산의 사상을 지금이야말로 모든 위정자가 철저히 마음에 새긴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