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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은 지리산과 섬진강 그리고 구례읍내를 한 눈에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절벽 끝에 세워져 있는 사성암이라는 멋진 암자를 진주처럼 품고 있다. 등산이라기보다는 가벼운 아침 운동쯤으로 생각하고 출발한 산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르고 내리는데 1시간이 조금 더 걸리기 때문이다.
등산로 입구에 도착해서 보니 지난번 내린 눈들이 그대로 쌓여 있어 길이 미끄럽다. 도로에 있는 표지판부터 시작되는 300여 미터의 가파른 임도 끝에서 산길은 시작된다. 회색의 콘크리트로 포장된 임도는 새하얀 눈으로 새롭게 포장되어 있었다. 가파른 눈길을 보니 동네 언덕에서 비료포대를 썰매 삼아 타던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난다.
눈길 산행의 묘미는 미끄러움과 소리에 있다. 눈길을 걷는 것은 평소에 마찰력이 주는 안정감에 익숙한 보행을 어느덧 마찰이 없는 새로운 보행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이다. 마찰력이 없다 보니 신발은 앞으로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뒤로 미끄러진다. 이것을 방지하는 장비가 아이젠인데 아이젠은 보통 2개에 12개까지 미끄럼 방지를 위한 발톱이 달려 있다. 동물들처럼 발달된 발톱이 없는 인간에게 쇠로 만든 발톱을 달아 미끄러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이젠을 준비하지 못했다. 그러니 그냥 미끄러지는 수밖에 없다. 눈길이 선물한 묘미를 제대로 즐겼지만 조심조심 하느라 평소 시간에 두 배가 걸렸다.
눈길에서는 보통 두 가지 소리가 났다. 하나는 뽀드득 뽀드득 하는 소리인데 이런 경우는 눈이 펑펑 내렸지만 포근한 날이다. 또 하나는 서걱서걱 소리가 나는데 이런 경우는 눈이 내린 지 오래 되어 윗부분이 살짝 녹았다가 얼은 날 아침에 나는 경우다. 지금 걷고 있는 눈길에서는 서걱서걱 소리가 난다.
곁님은 '서걱서걱' 눈 소리는 '뽀드득'보다 운치가 없단다. 한적한 산길의 둘만의 이야기가 포근한 겨울 햇살처럼 숲 속으로 퍼져나간다.
미끄러운 눈길을 아이젠 없이 오르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다. 땀이 등줄기를 타고 허리쯤 내려올 때쯤 오산 활강장에 도착한다. 우리는 목표는 여기까지다. 정상으로 가는 길은 북쪽이어서 눈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고 더욱 미끄러울 것이기 때문이다. 앞산 오르는데 욕심을 부릴 것도 없다.
겨울 햇살에 신발에 묻어 있던 눈들이 녹기 시작하면서 발이 시리다. 정작 눈이 묻어있을 때는 발이 시리지 않고, 눈이 녹으니 발이 시리다. 곁님이 준비한 생강차로 몸을 녹여 보지만 여의치가 않다. 더구나 아침도 안 먹고 출발한 산행이다 보니 배에서는 꼬르륵 신호가 연신 전해진다. 이럴 때는 하산이 최선이다.
눈 내린 산길은 오르막보다 내리막이 더 어렵다. 오르막이 어렵고 내리막이 쉽다는 것도 눈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는 예외다. 올라올 때보다 시간도 더 걸리고 신경을 집중하다 보니 더 힘들다. 이럴 때는 사람들이 많이 올라온 곳보다는 눈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을 골라서 내려오는 것이 방법이다. 드디어 다시 눈으로 잘 포장된 임도에 도착했다.
휴우, 무사히 내려왔네…… 곁님이 산길을 벗어나 임도에 도착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임도 주변에 밭을 살펴보니 버려진 비료포대가 있다. 포대 안에는 폭신하게 그물망까지 들어 있다. 비료포대 썰매를 들고 후다닥 곁님에게 달려가 승차를 권한다. 곁님을 태운 비료포대는 하루 종일 터미널 앞에서 손님을 기다린 시골읍내 택시처럼 기다렸다는 듯이 눈길을 미끄러진다. 시원한 바람이 곁님의 머릿결에 잠시 머물다 뒤로 향한다. 곁님은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적막한 시골마을에 울려 퍼진다.
이제는 내 차례다. 어릴 시절의 추억을 생각하면 비료포대 위에 앉아 다리를 앞으로 쫘 뻗고 미끄러지기 시작한다. 쉬쉬 바람 소리를 내면 비료포대는 질주하기 시작한다. 웃음이 절로 난다. 발로 적당히 마찰을 주어 방향을 조정하는 것은 비료포대 썰매 운전의 기본기라고 할 수 이다. 비료포대는 쏜살같이 하강하여 마찰력이 중력을 이기는 곳에서 멈춘다.
마찰력이 없어서 오를 때 힘들었다면 마찰력이 없어 쉽게 내려간다. 상황에 따라 조건은 좋아지기도 나빠지기도 한다. 시골의 불편함이 때로는 즐거움이 되듯이 말이다.
둘만의 스키장에서 비료포대 썰매로 신나게 놀다가 집으로 뱃속에서 항의하는 꼬르륵 소리에 집으로 향한다. 비료포대는 다른 분을 위해 잘 보이는 곳에 두고 왔다. 혹 오산을 찾는 분이 있다면 두고 온 비료포대를 찾아보기를 권한다.
"자기야 오늘 산행 어땠어."
"어~~ 최고야."
"자기야~~ 비료포대 타는 것 너무 재미있다."
"그렇지. 야 시골에 사니까 이런 것도 해보는 거야."
"피. 도시에 살아도 등산을 다 할 수 있어."
곁님은 아직까지 도시에 살다 구례읍내로 내려온 것이 불만이지만 오늘 환하게 웃는 그녀를 보니 구례읍이 조금은 좋아진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2004년 9월에 대도시에서 지리산에 내려와 구례읍에서 살고 있습니다. 도농커뮤니티 자연을 닮은 사람들에 소개되었습니다.
http://www.naturei.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