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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구청역에서 5호선으로 갈아타려고 하다가 이를 발견했다. 계단은 텅 비어 있고 에스컬레이터는 사람들이 꽉 차서 기다리는 줄이 길었다.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를 말하는 게 아니다. 내려가는 사람들이 다 그랬다. 노약자나 몸이 불편한 사람만 타고 가면 좋을 걸 두 다리 멀쩡한 사람들이 너나없이 기계에 몸을 실었다. 저러고는 운동부족으로 허약해진 몸을 추스르느라 영양제 먹고 병원가고 하겠지. 저 무지막지한 기계를 움직이느라 원자력발전소 만들고 핵폐기물을 처분 하기 위해 난리를 피우겠지. 가슴이 콱 막혀왔다.
내가 지하철에서 에스컬레이터를 처음 본 것이 아니다. 이날 이토록 가슴이 막혀 온 것은 직전에 교대역에서 2호선을 갈아타면서 발견한 승강장 차단 칸막이의 영향을 받아서일 것이다.
전철 승강장을 가로막고 선 칸막이를 발견하고 나는 숨이 턱 막혔다. 감옥에 갇힌 기분이었다. 안전장치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칸막이가 무엇으로부터의 안전일까를 생각했다. 자살하는 사람. 복잡한 군중에 떠밀려 철로로 떨어지는 사람. 부주의한 실족. 어린 아이의 추락. 대충 이런 것일 것이다.
내 눈에는 승강장 칸막이가 '안전'으로 보이지가 않고 '더 큰 불안'으로 보였다. 삶을 포기하여 목숨을 스스로 끊는 사람들을 이제 우리는 저 완고한 칸막이로 막겠다는 것이구나. 인구과밀의 서울 교통재난을 수도이전은 반대하며 저 칸막이로 막아보겠다는 것이구나. 서울이라는 동네는 아이 손을 놓치거나 잠깐 실수하면 목숨이 날아 갈 수도 있다는 것이구나. 문제의 근원에는 손을 대지 못하고 이런 대증요법(원인을 두고 증세에만 실시하는 치료법)으로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고 하는구나.
정전이라도 되면 지하철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중의 문을 부수고 나와야 하니 빠삐용의 스티브 멕퀸이 되어야겠구나.
전철이 도착하고 계단을 향해서 내 달리는 서울의 시민들은 신도림역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사람들이 그 넓은 계단을 다 점령하고는 밀물처럼 쏠려 내려가자 올라오던 사람들은 자기가 탈 전철을 코앞에 둔 채 뒤로 떠밀려 내려갔다. 한 사람이 넘어지면 압사사고 날 것 같았다. 이런 데서는 테레사 수녀님 아니라 그 할애비라도 어린이나 늙은 노인을 살피고 돌볼 겨를이 없을 것이다. 건장한 내 한 몸 추스르기도 힘들었다.
송정역으로 가는 전철에서는 자리를 잡았는데 시각장애를 가진 노파가 조악한 유인물을 나눠주며 구걸을 했다. 책을 보던 내 무릎에도 삐뚤빼뚤 복사된 글자들이 초라하게 놓여졌다. 전철 안의 시민들은 누구도 걸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속된 말로 개념 없는 얼굴로 무료 광고신문을 뒤적이거나 손전화 문자판을 두드려댔다. 옆자리의 젊잖게 생긴 할아버지가 그냥 일어서서 전철을 내리자 할아버지의 무릎에 놓였던 눈 먼 노파의 생명줄은 볼품없이 전철바닥에 나뒹굴었다. 내가 속죄하는 마음으로 그걸 주워서는 내 것이랑 포개서 천 원짜리를 얹어 노파에게 주었다.
서울 사람들은 그럴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하루에도 수십 명씩 만나는데 어찌 다 적선하겠냐고. 그 말만 하면서 1년 내내 단 한 사람에게도 적선하지 않는 자신을 보지 못할 것이다.
어떤 환승역에서는 통로의 가운데를 막아 광고판을 설치하고 "좌측통행을 합시다"고 적어 놓았다. 한참을 서서 시켜보았다. 이쪽 전철이 도착할 때는 이쪽 통로가 미어터지지만 저쪽 통로는 텅 비었고, 저쪽 전철이 도착할 때는 그 반대쪽이 미어터졌다.
좌측통행 하나도 안내 글만 가지고는 안 되니 아예 넘나들지 못하게 막아버린 서울시 당국의 조치에 인격권과 공중도덕심 침해로 항의하는 시민이라도 나온다면 위안이라도 될 것 같았다.
신대방역에서였다. 형님 집으로 가는데 좁은 인도는 물론 차도에까지 내려서서 그 추운 날씨도 아랑곳하지 않고 반 벌거숭이 아가씨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불고기집을 새로 개업한 모양이다. 귀를 찢는 음악도 그랬지만 그 불고기집 앞을 지나자니 눈을 멀게 할 정도의 강한 사이키조명이 내 얼굴을 찌르고 지나갔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사장님 면담을 요청했다. 사장님은 이제 곧 끝날 시간 되었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음식의 질과 정성으로 손님을 끌어야지 이렇게 공공의 장소를 무단 점거해서는 호응 받지 못할 거라고 무력하기 짝이 없는 말을 남기고 음식점을 나왔다. 저 비용이 다 음식 값이 포함될 것으로 보였다. 바로 옆에 있는 파출소에 가서 신고했다. 경찰은 내 신고에 불성실했다. 불경기에 장사 좀 하려고 하는데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정식으로 신고할 거냐고 하면서 그러면 단속 나가겠다고 했다. 지역민에게 참 배려 깊은 경찰이었다.
서울 시내버스를 탔다. 창과 창 사이에 비치된 비상시 탈출용 망치가 있었다. 그 밑에는 망치를 도난당하는 일이 많다며 가져가지 말라는 붉은 글자가 박힌 안내판이 있었다. 그러나 그 망치는 비상시에도 사용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도난을 방지하는 튼튼한 고정 끈으로 묶여 있는 것이었다. 칼이 없이는 맨손으로 그 끈을 자를 수 없어보였다. 운전석 위에는 '감시용 카메라 녹화 중'이라는 표시판이 붙어 있었다. 돈 통에 돈 제대로 넣으라는 것인지, 운전사에게 주먹을 휘두르지 말라는 것인지 어쨌든 잠재적인 범죄자 취급을 당하고 있는 서울시민들의 소감이 궁금했다.
이틀간 내 눈에 비친 서울의 모습은 나의 과민함 때문이라고 코웃음 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심각함의 본질이다. 이미 무뎌져서 그것을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에 무릎 꿇는 삶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서울을 거쳐간 것은 다음 글에 소개되는 어느 대안학교의 전체 식구회의 참석 때문이었다. 이 대안학교의 모습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참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