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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실현과 사회민주화를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민가협은  ‘양심수 석방과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목요집회’도 600회를 맞이했다. 	우타ⓒ
인권실현과 사회민주화를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민가협은 ‘양심수 석방과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목요집회’도 600회를 맞이했다. 우타ⓒ ⓒ 우먼타임스
[채혜원 기자] 45년 간 수감된 김선명씨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양심수 생활을 했던 비전향장기수 안학섭씨는 지난 1995년 굳게 닫혔던 대전교도소 문을 걸어 나오며 "열리지 않을 것 같던 감옥 문을 연 사람은 바로 민가협 어머니들이었다"고 이야기했다. 양심수 석방, 국가보안법, 고문추방 등 인권실현과 사회민주화를 위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이하 민가협)의 중심에는 언제나 어머니들이 함께했다.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끌려간 아들, 딸을 면회하러 구치소에 온 어머니들이 모여 하나가 돼 만든 민가협은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국가정보원(옛 안기부)과 교도소 앞에서 밤을 새우며 농성을 벌였으며 양심수 석방을 위해 철야단식을 한 횟수만 해도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다. 집회와 시위 현장에서 싸우다 허리나 다리를 크게 다치는 일도 잦았다.

민가협이 인권실현과 사회민주화를 위한 활동에 온 몸을 바친 지 올해로 20년.

1993년 9월 시작한 '양심수 석방과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목요집회'도 2006년 1월 첫째 주면 600회를 맞이한다.

20년 사이, 세상은 많이 변했다. 1995년에 세계 최장기수 김선명씨가 석방됐고, 2000년 9월에는 비전향 장기수 63명이 북으로 갔다. 고문기술자 이근안씨의 고문으로 간첩이라고 거짓 자백한 함주명씨의 재심을 추진해 지난 7월 무죄 판결을 받아내기도 했다. 또 민가협 장학생이라 일컫는 김근태, 권영길, 유시민, 고진화, 임종석 현 국회의원들도 민가협 석방운동에 빚을 진 이들이다.

민가협은 매주 목요집회를 통해 수십 년 동안 잊혀졌던 초장기수들을 세상에 알렸고 '양심수'라는 것을 인정받게 했다. 지난 12월22일 탑골공원 앞에서 열린 598차 목요집회에서도 변함없이 '고난 속의 희망'을 상징하는 보랏빛 물결이 일었다. 이날 집회는 지난달 15일 열린 농민대회에서 경찰폭력진압으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고 전용철, 홍덕표씨에 대한 정부의 사죄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자리였다. 집회에 참석한 고 전용철씨의 형 전용식씨는 "사건 발생 한 달이 지났는데도 진실에 대해 말하지 않는 정부가 안타깝다"며 "이 자리를 통해 더 이상 어두운 나라가 되지 않도록 여러분들이 힘이 되어주길 바란다"고 심정을 전했다.

600회 집회를 앞두고 민가협은 그동안의 성과를 바탕으로 재도약을 다짐하고 있다. 박성희 간사는 "1980년대 억울하게 간첩으로 몰려 가정이 파탄 나고 지금까지 고통 속에서 살고 있는 '조작간첩' 해명과 함께 철저한 진상규명활동을 펼쳐갈 계획"이라며 "고문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리고 사회적 약자들의 울타리를 튼튼하게 할 수 있도록 의식전환 작업에도 심혈을 기울일 예정"이라고 향후 계획에 대해 밝혔다.

목요집회가 거듭될수록 어머니들도 늙어 기력이 떨어지고 있지만 민가협은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고발 없이는 인권이 있을 수 없기에 오늘도 행진한다. 그들의 목요외침은 모든 양심수가 석방되고 인권이 실현되는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기운이 있는 한 끝까지 싸울 거여"
[인터뷰] 정순녀 할머니

"여전히 과거사 진상규명이 제대로 되지 않는 현실 때문에 화가 나서 가끔 밥을 못 짓곤혀. 지금 많은 어머니들이 늙고 아파서 함께하지 못하고 있지만 기운이 있는 한 끝까지 싸울 거여. 20년을 한결같이 싸워온 것처럼 말이여."

정순녀(69) 할머니는 82학번인 아들이 노동자들을 조직해 민주화를 이루려는 꿈을 안고 위장취업을 해 구속된 1987년부터 민가협과 함께 싸워왔다. 그 당시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던 어머니들은 민가협을 통해 하나가 됐다고 한다.

변호사를 선임할 때도 민가협을 통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인권변호사를 만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나가 된 어머니들은 양심수 석방과 국가보안법 철폐 등을 위한 인권활동에 온 몸을 바쳤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정 할머니가 가장 크게 느끼는 감정은 '상실감'이다. 지금은 너무 싸움이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군사독재에 맞서 인권을 위한 활동에 정말 많은 시민이 참여했었지. 근데 이제는 사회가 너무 냉정해졌어. 젊은 어머니들이 우리 활동을 이어나가는 게 고마울 뿐이야."

정 할머니 가슴을 시리게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목요집회에 참여하는 어머니들이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창립 초기부터 참여해 네 차례 상임의장을 맡았던 임기란 할머니도 너무 많은 투쟁현장을 다니다 지병인 당뇨 증세가 심해져 현재 병원에 입원해 있다.

그러나 몸이 오들오들 떨리는 엄동설한에도 어머니들의 굳은 의지는 변함이 없다. 수배, 체포, 고문, 실망스러운 판결 등을 배척하고 양심수란 말이 이 땅에서 사라질 때까지 힘껏 싸우겠노라던 임 할머니의 말처럼, 정 할머니 역시 거리를 떠나지 않을 것을 다짐한다.

"20년간 인권과 관련된 현장이라면 언제나 달려갔었던 것처럼 앞으로도 우리는 현장에서 계속 싸울 것이여. 내 몸이 허락하는 한 내 싸움은 계속 될 것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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