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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낀 겨울 아침 섬진강을 찾았습니다. 섬진강은 집에서 자전거를 타고도 5분이 채 걸리지 않습니다.
제가 사진을 찍기 위해 찾은 곳은 전남 구례 문척교입니다. 문척교는 난간이 아주 낮은 보기 드문 다리입니다. 무슨 연유로 난간이 그리 낮은지 알 수 없지만, 난간이 성벽처럼 높아서 강과 인간의 경계를 선명하게 구분해놓은 요즘 다리들과 사뭇 다른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섬진강변을 걷고 있는 저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신발 한 켤레였습니다.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검정색 운동화 한 켤레. 누군가 방금 벗어놓고 강물로 들어간 듯 한 신발 한 짝이었습니다.
아침 강변에 주인 없이 혼자 남은 신발 한 켤레. 가까이 다가가보니 소주병 하나가 친구처럼 남아있습니다. 이 추운 겨울 섬진강에서 소주 한 병을 마시고 신발 한 짝을 벗어놓은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방금 신고 있었던 것처럼 뒷부분이 구겨져서 아직 펴지지도 않은 싸구려 검정색 운동화, 그것은 어쩌면 우리 시대의 가난한 서민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그 신발의 주인공은 WTO에 힘겨운 시골농부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혹은 밤새 전라선 기차를 타고 섬진강에 도착한 실직한 남자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망연자실한 남자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겨울 섬진강으로 가족과 함께 놀러온 남자의 신발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검정색 남자 신발과 소주 한 병. 문득 혹시나 하는 불길한 마음에 주변 강가를 찾아봤지만 섬진강변 어디에도 그 남자의 흔적은 없었습니다. 다행입니다. 신발만 벗어놓고 강변에 앉아 소주 한 병을 마시고 떠나버린 모양입니다.
어쩌면 그 남자에게는 또 다른 신발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에게도 항상 또 다른 희망이 있듯이 말입니다. 절망의 벼랑 끝은 희망이라고 누군가 그러더군요.
섬진강을 떠나 집으로 돌아오면서 소주를 마시던 그 남자가 아니 그 농부가 아니 그 실직한 도시민이 아니 실연한 남자가 섬진강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아 강물속의 길이 아닌 사람의 길로 다시 당당히 걸어갔기를 기원해봅니다. 그래서 새해에는 섬진강에서 혼자 소주를 마시는 슬픈 영혼이 없기를 소망해봅니다.
덧붙이는 글 | 전남 구례 문척교는 구례읍 터미널에서 걸어서 10분정도의 거리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