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불꼬불한 길을 가니 아들이 멀미를 해서 여간 안쓰러운 게 아니었다. 좋은 곳 보여준답시고 아들을 괜한 고생을 시키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들 녀석이 태어나서 처음 보는 동해바다에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것이었다.
지난 1999년인가. 밤에 무작정 동해바다가 보고 싶어 감포까지 내달린 적이 있었다. 늦가을이라 꽤나 쌀쌀한 날씨였는데 차안에서 밤을 꼬박 새우고 이른 아침 일출을 보고는 감은사지는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다시 집으로 돌아온 일이 있다. 동해바다는 남해나 서해와는 달리 끝없는 수평선을 볼 수 있다는 매력 때문인지 한 번씩 최면을 건다.
여전히 대왕암은 그 자리에 굳건히 왜적들을 감시하고 있는 듯 의연한 모습이었다. 감포에서 나와 감은사지(感恩寺址)에 들르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다. 오랜만에 와 보니 예전의 모습과는 꽤 달라져 있었다.
절터도 지난 번보다 많이 발굴한 것 같고 그것들을 보기 좋게 정렬까지 해 놓았다. 지금 무엇보다 많이 달라진 것은 서탑을 수리하고 있는 것이다. 빨리 수리가 끝나서 거추장스런 철제감옥에서 빨리 벗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1998년 가을,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소속 과학자 두 분을 모시고 이틀간 경주 관광가이드를 한 일이 있다. 그 당시 여러 군데를 다녀왔지만 가장 인상적인 곳이 기림사(祇林寺)라는 643년(선덕여왕 12)에 창건된 절이었다.
기림사에는 다른 유명한 보물들이 많지만 내 시선을 끈 것은 대적광전(大寂光殿)-비로자나물(毘盧遮那佛)을 본존으로 모시는 곳-의 꽃살문이었다. 기림사 대적광전에는 아름다운 꽃살문이 있는데 세월의 흔적으로 단청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원래 단청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여 그 맛이 채색된 꽃살문과는 많이 달랐다.
러시아 과학자들을 데리고 왔던 그 당시는 오후 늦게라 빛이 너무 없어 사진으로 남겨오지 못해 아쉬움이 컸는데 이번에는 날씨가 좋기도 했지만 해가 아직 많이 남아 있어서 여유로운 마음으로 꽃살문 하나하나의 정성을 생각하면서 필름에 담아 봤다. 이 곳의 꽃살문은 1997년 보수공사를 거쳐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번 경주 여행을 하면서 꼭 둘러보리라 마음먹은 곳이 있었다. 여태까지 사진으로만 보아 온 황룡사지(皇龍寺址)를 꼭 둘러보는 일이었다. 황룡사지는 사적 제6호로 1963년 지정되었는데 왕명으로 553년(신라 진흥왕 14)에 창건하기 시작하여 566년에 주요 전당들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 때까지에 모든 건물이 완공된 것은 아닌 것으로 전해진다. 금당(金堂)은 584년(진평왕 6)에 비로소 완성되었고, 신라 삼보(三寶)의 하나인 9층 목탑은 643년(선덕여왕 12)에 착공되어 그 다음해에 완공된 사실이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되어 있다.
이 절은 신라 왕성인 월성(月城) 동쪽에 있었는데, 그 창건 기록에는 진흥왕이 신궁을 월성 동쪽 낮은 지대에 건립하려 했으나 그곳에서 황룡이 승천하는 모습을 보고, 왕이 신궁 조성을 중지하고 절로 만들게 하여 황룡사라는 사명(寺名)을 내렸다고 한다. 국가적인 사찰이었기 때문에 역대 국왕의 왕래가 잦았고 신라 국찰 중 제일의 자리를 끝까지 지켰다고 한다.
신라 멸망 후에도 황룡사는 고려 왕조에 이어져 깊은 숭상과 보호를 받았으며 9층 목탑의 보수를 위해 목재까지 제공받았으나 1238년(고종 25) 몽골군의 침입으로 탑은 물론 모든 건물이 불타버려 지금 절터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황룡사지의 규모는 거기 가 보면 더 자세히 알 수 있겠지만 입구에서 아득히 보이는 탑까지만 해도 몇 백 미터는 족히 넘어 보인다. 2만평이 넘는 땅이 다 황룡사의 옛터였다면 그 당시 얼마나 큰 절이었을까? 상상하기가 힘들다.
우리나라에 정말 뛰어난 문화유산들이 많은데 다수가 전쟁으로 인해 불타 없어진 것에 대해 가슴이 아프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다음에 언젠가 시간이 된다면 황룡사지에 누워 계림의 밤하늘을 하염없이 감상하고 싶다. 황룡사에 놀던 풀벌레들이며 이슬과 벗하여 하루를 보내고 싶다.
황룡사지 바로 옆에는 분황사(芬皇寺)가 있다. 특이하게도 이 분황사의 당간지주는 황룡사터 앞에 있어서 처음에는 황룡사의 것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분황사 당간지주였단다. 분황사는 634년(선덕여왕 3)에 창건(創建)되었다. 국보 제30호로 지정된 모전석탑(模磚石塔)을 비롯하여, 화쟁국사비 비석대(和諍國師碑 碑石臺)·석정(石井)·석조(石槽)·초석(礎石)·석등·대석(臺石)과 사경(寺境) 이외에 당간지주(幢竿支柱)가 남아 있다.
이 절에는 775년(경덕왕 14) 본피부(本彼部)의 강고내미(强古乃未)가 구리 30만 6700근을 들여 만들었다는 약사여래동상이 있었다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원효(元曉)가 이곳에서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썼고,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은 신화(神畵)로 일컬어졌다. 또한 절의 좌전에 있었던 천수대비(千手大悲) 벽화는 매우 영험해서 눈 먼 여자 아이가 노래를 지어 빌었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고 전한다.
모전석탑은 돌을 벽돌 모양으로 깎아 마치 벽돌로 만든 것 같은 느낌을 갖도록 한 탑이란 뜻이다. 삼국사기에 보면 선덕여왕 3년에 분황사가 낙성되었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선덕왕 3년이면 서기 634년이다. 원래는 9층이었다 하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 1층 탑신에 조각한 인왕상은 불법을 수호하는 신으로 부드러우면서도 힘찬 모습이다.
햇살을 잘 받은 석탑에 나무 그림자가 짙게 깔린다. 좁은 경내를 잰걸음으로 한 바퀴 두르고는 분황사를 빠져 나왔다.
이제 어둠이 짙게 내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잠시 차를 세우고 안압지 야경을 한 번 볼 요량으로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명으로 안압지를 잘 꾸며놓았는데 날씨가 추워서인지 조명까지 너무 차갑게 느껴졌다. 겨울가뭄 때문인지 안압지에 물까지 별로 없어 스산한 느낌마저 들었다.
집으로 오는 두 시간 내내 머릿 속에서 황룡사지가 맴돌고 있었다. 정말 황룡사지에서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이슬을 이불삼아 별을 볼 수 있을까? 혹, 운이 좋으면 계림하늘에서 별똥별이라도 볼 수 있을까? 꿈이라도 좋다. 꼭 한 번 그랬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 경주에 관한 자료는 이 곳에 가면 더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1. 경주시 홈페이지(http://www.gyeongju.go.kr)
2. 한국관광공사 홈페이지(http://www.knto.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