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본권제한, 과잉금지원칙 준수해야
위헌으로 매듭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준칙은 비례의 원칙입니다. 과잉금지원칙이라고도 부릅니다. 헌법 제37조 제2항에서 나옵니다.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제한할 수 있는데, 이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할 수는 없으며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하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조항은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는 근거규정이면서 동시에 제한입법의 한계규정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지요.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라고 표현이 함의하는 바가 비례의 원칙 또는 과잉금지의 원칙입니다. 기본권을 제한할 때 준수하여야 하는 방법상 넘어서는 안 되는 한계이지요. 기본권 침해여부를 가늠하는 데 확고하게 자리잡은 판단원칙입니다. ①목적의 정당성 ②수단의 적합성 ③침해의 최소성 ④법익의 균형성 등으로 구체화됩니다. 그 어느 하나에라도 저촉되면 기본권을 침해하는 위헌으로 판가름되지요.
정치권이나 언론에서 법률의 위헌성 논란이 불거지는 일이 흔합니다. 논쟁에서 가장 빈번하게 문제되는 잣대가 비례의 원칙(과잉금지원칙)입니다. 네 단계로 나누어서 생각을 가다듬어보면 상대방 의견을 분별하고 스스로 입장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피해의 최소성과 법익의 균형성 일탈
이 사건 경우를 보면, 앞서와 같이 '목적의 정당성'은 인정되었고 '수단의 적합성'이라는 관문도 통과하였지요. 부분적인 적합성으로도 충분하고 완전한 적합성까지 바라는 것은 아니어서 수단 적합성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만 부인됩니다. 관건은 '침해의 최소성'단계부터입니다.
법 제3조는 원칙적으로 허용되고 기본권적으로 보장되는 행위에 대하여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예외적으로 허용하는 방식의 '원칙과 예외'가 전도된 규율형식을 취한데다, 그 내용상으로도 규제의 편의성만을 강조하여 입법목적달성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금지범위에 포함시킬 불가피성이 없는 행위의 유형을 광범위하게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입법자가 선택한 규제수단은 입법목적의 달성을 위한 최소한의 불가피한 수단이라고 볼 수 없다.
'침해의 최소성'을 넘어섰다고 본 것입니다. 입법자는 완화된 수단이나 방법을 최대한 모색해 선택한 기본권 제한조치가 필요최소한의 것이 되도록 하여야 하지요. 그러자면 규제형식은 '원칙적인 금지'가 아닌 '반사회성을 띤 예외적인 경우에 한하여 금지'여야 합니다. 유해하지 않은 본디 자유로운 권리에 대한 제한인 경우 더욱 그러합니다.
다음에 나오는 '법익의 균형성'은 규제하면서 초래되는 사적 불이익과 그 행위를 방치함으로써 생기는 공적 불이익을 비교해서 재보는 것을 일컫습니다. 보호하는 공익이 침해되는 사익보다 커야합니다. '침해의 최소성'을 통과하지 못한 경우 대개 '법익의 균형성'도 부인됩니다. 이번 사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적인 교육의 영역에서 부모와 자녀의 기본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라는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국가를 문화적으로 빈곤하게 만들며, 국가 간 경쟁에서 살아남기 힘든 오늘날의 무한경쟁시대에서 문화의 빈곤은 궁극적으로는 사회적·경제적인 후진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법 제3조가 실현하려는 입법목적의 실현효과에 대하여 의문의 여지가 있고, 반면에 법 제3조에 의하여 발생하는 기본권제한의 효과 및 문화국가실현에 대한 불리한 효과가 현저하므로, 법 제3조는 제한을 통하여 얻는 공익적 성과와 제한이 초래하는 효과가 합리적인 비례관계를 현저하게 일탈하여 법익의 균형성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헌법불합치의견이 돋보이는 까닭
과잉금지원칙위배로 기본권제한 방법상의 한계를 일탈한 것으로 위헌이라는 종착역에 다다르게 된 과정을 보았습니다. 비례의 원칙 혹은 과잉금지원칙 위배여부를 판단하는 데는 가치관이 개입됩니다. 유일한 정답이 있다고 보기 힘듭니다. 경제적 문화적 여러 요소도 고려할 자료입니다. 시각에 따라 관점 차이로 분석이 다를 수 있습니다.
헌법재판소 결론이 무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원칙과 예외를 거꾸로 규정해서 위헌판결을 받은 사례는 더러 있습니다. 본질이 해롭지 않은 시민의 자유를 국가가 제한할 때는 주의를 더 기울여야 합니다. 하멜의 글에서 드러나듯 개인적으로 더 배우고자 하는 욕구는 근대국가 이전에 존재하는 자연스런 인간욕망일지도 모릅니다. 천부인권이라고 볼 수 있지요.
아쉬움은 남습니다. 입법기술 잘못으로 위헌이라면 헌법불합치 결정을 선고하는 것이 솔로몬의 지혜에 더 가깝지 않았을까 가정해봅니다. 입법자의 미숙함 혹은 안일함이 사회전체 피해로 떠넘겨지지 않도록 하는 배려가 마냥 그리운 것이지요. 위헌결정 이후 뚜렷한 입법 후속조치가 없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신고제를 도입했지만 신고실적이 저조하고 실효성 낮은 대증요법이라는 비판이 많습니다.
재판관 정경식의 반대의견 또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네요. "이 법률조항의 위헌성은 과외교습의 규제방식이 기본권제한입법의 체계와 방식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한 데에 있는 것"이라는데 착안합니다. 입법자가 국민적 합의를 거쳐 합리적인 범위에서 규제할 수 있도록 새로운 입법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법률조항을 잠정적으로 적용하도록 하는 헌법불합치결정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견해입니다. 재판관 한대현의 헌법불합치의견도 비슷한 입장입니다.
다수의견도 "비록 위헌결정이 선고되었다 하더라도, 반사회적인 과외교습에 한정하여 중대한 사회적 폐단이 우려되는 경우에는 이를 규제할 수 있는 입법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하므로 결론 아닌 과정에 있어서는 별반 다르지 않아 섭섭함이 남는 것이지요.
가슴으로 쓴 합헌의견
2000년 4월에 이 결정이 내려지고나서 공교육 정상화와 사교육비 절감이라는 과제는 여태 뾰족한 해결기미가 없습니다. 당시 이영모 재판관은 홀로 합헌의견을 냅니다. 말미에 '여론(餘論)'이라 하여 안타까운 심정을 풀어놓았습니다. 법관의 결정문답지 않은 절절함이 녹아있네요. 요즘 어느 신문 칼럼을 보는 듯 합니다.
세기가 바뀐 2000년을 정보통신(digital) 혁명시대라고 한다. 1997. 12.초에 시작된 IMF 외환위기 수습에 몰두하는 동안, 우리 사회는 실업자의 증가, 빈곤층의 확대, 중산층의 축소 등 부의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진 시대를 맞게 되었다. (중략)
이 조항에 대한 위헌판단은 결과적으로 개인 과외교습을 제한 없이 자유롭게 허용하자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가진 자 스스로가 자제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한 시기이자 사회·경제적 약자의 외침에 귀 기울여야 할 시기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은 고려하지 아니하고, 과외교습과 직·간접으로 관련이 있는 학부모의 학교선택권의 규제 및 자율이 아닌 대입수능의 정당성 여부에 관하여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아니한 채 개인 과외교습을 허용하는 것이 옳다고 보는 위헌판단은, 학원에서 겨우 과외교습을 받거나 과외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수많은 학부모는 물론 그들의 자녀들이,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안타까움과 위축감을 느끼고 허탈감과 좌절감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이 결정이 어린 그들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입히는 것은 아닌지, 혼자만의 기우이자 노파심이기를 바랄 뿐이다.
|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