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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단의 중견인 이동순 시인의 열두 번째 신작 시집 <미스 사이공>(랜덤하우스중앙, 2005)이 출간되었다. '미스 사이공'이라는 시집 제목이 암시하듯 이 시집은 이른바 '베트남 문제'를 오롯이 담고 있다. 시인이 재직하고 있는 영남대학교 해외봉사단을 이끌고 베트남 기술학교에서 보낸 체험이 시집 <미스 사이공>에 수록된 시 62편의 밑바탕이다.

우리 문학사에서 '베트남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으로는 그리 많지는 않다. 먼저 소설로는 제국주의 전쟁인 베트남전의 본질을 간명한 문체로 규명한 황석영의 장편 소설 <무기의 그늘>(창작과비평사, 1992), 월남파병의 허구성과 전쟁으로 인한 인간성 파괴를 보여준 안정효의 장편 소설 <하얀 전쟁>(고려원, 1993), 베트남전 참전 용사의 고엽제 후유증으로 한 가족이 파괴되어가는 과정을 리얼하게 그려낸 이대환의 장편 소설<슬로우 불릿>(실천문학사, 2001)이 있고, <랍스터를 먹는 시간>(창비, 2003)에 수록된 방현석의 단편 소설 '랍스터를 먹는 시간', '존재의 형식'도 베트남을 무대로 하고 있다.

이러한 소설과 비교하여 시의 성과물은 턱없이 부족한 듯하다. 베트남 작가연맹 서기장인 시인 휴틴의 시집 <겨울 편지>(문학동네, 2003)가 한국에서 출간되었고, 2000년 민족문학작가회의 베트남 방문의 체험을 23편의 시로 노래한 김정환의 시집 <하노이 서울 시편>(문학동네, 2003) 발간이 필자가 알고 있는 베트남 관련 시적 성과물의 전부다.

베트남의 뒷골목 풍경과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민중들의 삶, 그리고 지난 우리의 역사와 연관된 베트남 전쟁의 참상을 62편의 시로 그려낸 이동순의 신작 시집 <미스 사이공>은 이른바 '베트남 문제'를 다룬 소중한 시적 성과물이다.

저는 죄가 많아요
왜 그리도 쉽게 정을 주었던지
거듭 말씀드리지만
그분은 저를 사랑했습니다
이름조차 모르고
한국의 사는 곳도 알지 못합니다
김씨라는 성만 기억합니다
그때 태어난 그분 아들은 이제 청년입니다
서러운 라이따이한으로
손가락질 받으며 살아온 지난 수십 년
흥건한 눈물의 세월이었지만
언제나 저를
미스 사이공이라고 불러주던
그분을 기다립니다
언제까지나 돌아오기만 기다립니다
저 멀리 있는 세상
삶이 더 이상 가혹하지 않은 곳
거기서도 저는
그분을 기다릴 것입니다

-'미스 사이공' 전문


위 시에서도 드러나는 바지만, 시집 <미스 사이공>에서는 전후 베트남의 온갖 상처를 시로 불러내어 위무하고 있다. 이 상처들은 미제국주의 전쟁에 용병으로 동원된 우리들의 지난 과오와도 연관되어 있다. 또한 베트남 민중의 이런 아픔은 미국과 소련이라는 냉전체제의 결과로 야기된 한국전쟁 직후의 우리 민족의 상처와 동일한 아픔이기도 하다.

"서러운 라이따이한으로/손가락질 받으며 살아온 지난 수십 년/흥건한 눈물의 세월"에 손을 내밀어 잘못을 빌고 그들의 아픔에 동참하는 이러한 시인의 시적 행보는 해원(解怨)의 거룩한 몸짓이다.

영영 일어서지 못하고
병상에 누운 채로 눈만 뒤룩거리는 아이
뼈만 남은 앙상한 몸으로
마지막 숨을 헐떡이고 있는 아이
고엽제 맞았던 어미가
만신창이 몸으로 출산한 기형 아기
머리가 풍선처럼 부풀어서 눈에 초점 잃은 아이
나를 자꾸만 엄마라고 부르며
품에 안아달라는 아이
혼자 뒤꼍에 돌아앉아 온종일 숫자만 헤는 아이
손이 어깨에 달린 아기
이런 아이들이 백여 명 들어 있는
베트남의 고아원을 돌다가
나는 기어이 눈물 쏟고야 말았다
누가 이 맑은 영혼들에게
불행을 안겼는가

-'고엽제 2' 전문


이대환의 장편 소설 <슬로우 불릿>을 보면 미국에서는 고엽제 후유증 환자를 가리켜, 심장을 향해 서서히 다가오는 느린 총알 즉 '슬로우 불릿'으로 부른다고 적고 있다. 자본의 환락이 넘쳐나는 관광특구를 찾아가 '관광'하지 않고, 고엽제 후유증으로 기형 아기들이 백여 명이 들어 있는 고아원을 찾아가 그 아픔에 눈 맞추고 눈물 흘리는 시인의 몸짓이 감동적이다. 이것이 바로 이타행(利他行)의 실천이요, 상대를 끌어안는 모심(侍)의 지극한 몸짓이다.

시집 뒷부분 '시인의 말'에서 "이번 시집이 베트남 전쟁으로 상처받은 모든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을 나의 기쁨으로 삼고자 합니다"라고 하는 시인의 작은 목소리에 존경과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이동순의 신작 시집 <미스 사이공>은 시인의 말처럼 베트남 민중들의 아픔은 물론 제국주의 용병으로 참전하여 가해자였지만 또 하나의 아픔으로 남아있는 베트남참전 군인들의 상처를 동시에 위무하고 있다. 또 지난 대한민국의 역사적 과오에 대해서도 베트남 민중들에게 용서와 화해의 젖은 눈물을 담고 있다.

이동순 시인의 영남대학교 제자로 있는 베트남 유학생 부이 판 안트가 쓴 시집의 '발문'을 보면서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동순의 신작 시집 <미스 사이공>으로 인해서 한국과 베트남 사이에 가로놓여 있던 묵은 업장을 다 틀어내고 동아시아의 한 형제로서 손을 맞잡고 나아가는 계가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미스 사이공

이동순 지음, 랜덤하우스코리아(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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