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출발점은 천지창조다. 성서는 천지창조 이야기로 시작한다. 고대인이 신화를 믿는 것만큼 현대인은 물리학을 철썩같이 믿는다. 현대인이 아무리 물리학을 믿어도 시공을 초월하는 첫 창조 행위를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은 매력적인 일임이 틀림없다.
과학자들은 성경에 위배된 자연현상과 진화론을 증명해 냈다. 그들의 노력으로 인해 신은 정말 죽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는 아직도 종교적 기반으로 뭉친 세력들 사이의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인간이 죽음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 영원히 자신들이 믿는 신을 위해 싸울지도 모른다. 적어도 우리가 알고 있는 성서의 하느님은 굳이 평화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나의 어설픈 종교관은 어떠한가. 어린시절 친구 손에 이끌려 교회와 성당에서 들었던 하느님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고 기억하고 있는가, 지금 생각해보니 설교자의 의도와는 달리 너무나도 자위적으로 해석하고고 있었다.
'하느님은 절대자로 완벽한 자이다. 하느님은 세상만물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이 모든 걸 뜻대로 하실 수 있으며 모든 걸 정하신다.' 여기까지는 별문제 없이 하느님을 이해한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생각하지 않아 다음과 같은 오류가 생겨난다. '하느님은 선하고 정의롭고 모든 인간을 사랑한다. 그래서 세상을 옳게 이끄신다.'라는 가당치도 않은 정의를 만든 것이다.
절대자 하느님에 대해서 새롭게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은 <소설로 읽는 성서> 덕분이다. 이 책은 성서의 일부를 그리스, 이집트, 이스라엘 신화와 함께 근거로 삼았다. 다분히 작가의 주관적인 견해가 들어간 소설일 뿐이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 하느님에 대해서 비로소 알 수 있었다고 말한다면 또 다른 어설픔만 보이는 꼴이 된다. 그러니 내가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은 '절대자의 의미'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소설로 읽는 성서>는 모두 세권으로 나누어져 있다. 1권에는 천지창조에서 이집트에 정착한 요셉까지이고 2권은 모세의 탄생배경과 인간적인 고뇌와 죽음까지 보여주고 있다. 3권은 기록자 도마유다의 시선을 따라 예수와 이스카리오트 유다를 바라보는 1,2권과는 좀 다른 각도로 예수의 죽음을 그리고 있다.
절대자 하느님에 대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1,2권에서였다. 작가는 하느님을 그리스 신들처럼 인격화하고 있다. 그래서 하느님은 자신의 창조물이 오직 당신만 사랑하길 바라는 질투의 신으로 끊임없이 인간을 시험한다. 아브라함에겐 사랑하는 아들을 제물로 바칠 것을 요구하고 노아와 모세에게 인내를 요구한다.
왜 하느님은 인간에게 시험에 들게 하고 구원하는가?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지에 대해선 몇 가지로 해명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느님은 완벽한 절대자이다. 선악의 구분은 인간의 것이다. 고통 또한 인간의 것이지 하느님의 것이 아니다. 만약 하느님이 인간이 고통 받는 것을 아파한다면 그것은 예방접종과 같은 것이다.
긴 역사 속에 인간을 지켜보는 하느님에게 고통은 단지 다음을 살아내기 위한 따끔한 주사바늘과 같은 것. 순간의 고통 따위에 하느님의 의지를 방해 받을 필요가 없다. 고통은 인간 개개에게 이르렀을 때 크게 느껴지는 것뿐이다. 마치 인간이 무심코 걷는 발 아래서 개미집단이 고통 받듯이 말이다.
또 정의라는 단어를 하느님께 사용한다는 것은 온당치 않다. 하느님은 정의로울 이유가 없다. 그래서 정의를 행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우직하고 성실한 카인을 버리시고 지혜로운 아벨을 사랑했다. 형의 장자권을 빼앗은 야곱을 방관하고 가까이 하셨다.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고 교만 하는 요셉을 선택하여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세웠다. 하느님은 오직 당신의 뜻대로 하신다. 교만, 약탈, 성실, 지혜 이 모든 것은 인간이 만든 언어의 허상이다. 위에 존재하는 하느님은 모르는 것들이다.
따라서 세상에 이루어진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정의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승리의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인간에게 지지 않는, 믿는 곳에 승리를 안겨주는, 그 승리가 행복이나 안락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느님은 이름을 드높이기를 원한다. 하느님은 사랑하는 모세가 다른 이들의 아픔으로 괴로워 해도 이집트 왕을 이기기 위해 연거푸 재앙을 내린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현세에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인간의 고통이나 목숨은 중요하지 않다. 실제로 모세에게 하느님은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자들을 모두 없애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을 제안하기도 한다. 노아에게 보인 대홍수를 아무 거리낌 없이 재현하려는 것이다.
하느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 인간의 잣대에 휘둘릴 필요가 있겠는가 말이다. 인간을 사랑한다 하여 현세의 안락을 보장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의심스러운 것은 왜 하느님은 굳이 인간 앞에 나타나려 하시는가, 그리고 왜 갑자기 예수를 보내 인간을 구원하려 했을까,
나는 1,2권에서 하느님이 굳이 정의로울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3권에서 예수를 맞이했다. 예수의 등장은 앞의 정의를 다시 혼란스럽게 했다. 예수는 선을 말했고 정의를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의로움의 본질에 다가서는 해안을 갖고 있었다. 예수는 이때까지 하느님과는 달리 성자에 가깝다. 하느님은 왜 예수를 성자로 만들어 십자가를 짊어지고 죽게 했을까?
하느님은 고정불변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라면 가능한 일이다. 하느님은 절대 권력을 갖고 있지만 사마엘, 루시퍼, 하와로부터 도전을 받았다. 또 지상의 인간과 교류하고 대화하기를 원한다. 그 결과로 하느님은 성자인 예수를 보낸 것이다. 인간의 변화에 하느님이 반응을 보인 사건이다. 하느님은 이제 인간에게 정의와 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어머니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나의 어머니는 즐겨 <성서>를 읽으셨는데, 특히 루터 판 <성서>를 애독하셨다. 물론 어머니는 '신약성서'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갖고 계셨다. '구약성서'는 어머니의 마음을 조금은 언짢게 했기 때문이다. 나는 장난삼아 하느님의 잔혹함, 그분의 불공정함, 알다가도 모를 그분의 행동, 그분의 소심함, 그분의 성급함을 입증하는 구절들만 일부로 골라내서 어머니께 보여주기도 했다.
'구약성서'이야기를 읽다보면 사람들만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도 그렇게 성장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단다.'
작가의 어머니의 말이 정답은 아닐지라도 하느님을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일 수는 있을 것 같다.
세상에서 제일 많이 읽히는 책이 성경책이라지만, 비 기독교인이 성경을 읽기란 쉽지 않다. 성경책을 완독하지 못한 나는 그들의 맹목적인 믿음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성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일이라고 여긴 탓이다. 잠시 소설로나마 절대자의 힘을 느꼈고 그 힘 앞에 이성이란 얼마나 나약한가, 인간의 선악의 판단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 하느님의 힘은 기록을 통해 생기고 이어진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 같다. 하느님은 선택한 자에게 승리를 안겨주고 기록을 남겼다. 우리가 하느님을 알 수 있는 것은 기록에 의해서이고 기록은 결국 하느님이 선택한 인간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구약성서'뿐만 아니라 역사는 언제나 승자에 의해 기록되었다. 하느님의 역사가 승자의 역사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따라서 하느님을 믿으면 승리자가 된다는 것은 정당한 귀납적 논증의 자료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객관적인 판단을 떠나 한 인간이 자신의지에 따라 뜻을 세워 승리를 이루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믿음이 필요하다. 성취하려는 것이 절대 신인 하느님의 뜻이라는 믿음은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 이런 믿음은 선악을 분별하지 않아, 더욱 힘이 있고 그래서 위험하다. 구약성서에서 보여주는 하느님이 힘이 이러한 것이기에 경이로움과 두려움이 느껴진다.
그에 비해 예수는 성자와 같은 세련된 인격체로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다. 기록은 또 하나의 하느님을 모습을 현세화 시킨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어머니의 말을 빌어 성장하는 하느님을 만들었다. 작가의 말처럼 하느님도 인간과 더불어 성장한다면 지금쯤 다시 한번 예수의 탄생 같은 종교혁명을 꿈꿀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모든 종교가 하느님 앞에 화합하고 각자의 관습에 따라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는 없을까?
덧붙이는 글 | 소설로 읽는 성서1,2,3 / 미하엘 쾰마이어 지음 / 현암사
리더스 가이드와 알리딘에 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