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윤중호는 1956년 충북 영동군 심천에서 태어나 숭전대학교(현 한남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84년 계간 <실천문학>을 통해 문단에 나왔으며 1980년 중반부터 <삶의문학>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지역 문학운동에 중추적 역할을 해왔다. 시집으로 <본동에 내리는 비> <금강에서> <청산을 부른다> 등이 있고, 2004년 9월 지병의 악화로 영면하였다. 그러니까 시집 <고향 길>은 그가 이 세상에 남겨둔 마지막 유고 시집이 되는 것이다.
원래 이 시집은 윤중호 시인이 2004년 12월 말 어머니의 칠순에 맞추어 출간을 준비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시인이 갑자기 그해 9월에 운명함으로써 출간하지 못하고 있다가 지인(知人)들이 뜻을 모아 새로이 출간 계획을 세우게 되었고, 이 소식을 알게 된 문학과지성사에서 선뜻 유고 시집 발간을 받아들임으로써 2005년 8월20일 고인의 1주기에 맞춰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고인의 친구인 김용항 온누리출판사 대표가 유고(遺稿)를 문학과지성사에 전달하였고, 출간 과정에서의 책임 교정은 고인과 문학 활동을 같이하였던 채진홍씨가 맡았으며, 시집의 발문은 대학교 은사이자 <녹색평론>발행인 김종철 평론가가 썼다.
고 윤중호 시집 <고향 길>은 산업화에 소외된 우리 고향 농민들의 삶에 대한 서늘하고 애절한 목소리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끝내 "우리 모두 돌아갈 길"에 관해 시인이 지상에 마지막으로 남긴 이야기들이다.
산딸기가 무리져 익어가는 곳을 알고 있다.
찔레 새순을 먹던 산길과
삘기가 지천에 깔린 들길과
장마 진 뒤에, 아침 햇살처럼, 은피라미떼가 거슬러 오르던 물길을
알고 있다. 그 길을 알고 있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넘실넘실 춤추는 꽃상여 타고 가시던
길, 뒷구리 가는 길, 할아버지 무덤가로 가는 길
한철이 아저씨가 먼저 돌아간 부인을 지게에 싣고, 타박타박 아무도 모르게 밤길을 되짚어 걸어간 길
웃말 지나 왜골 퉁정골 지나 당재 너머
순한 바람 되어 헉헉대며 오르는 길, 그 길을 따라
송송송송 하얀 들꽃 무리 한 움큼씩 자라는 길, 그 길을 따라
수줍은 담배꽃 발갛게 달아오르는 길
우리 모두 돌아갈 길
그 길이 참 아득하다. - '고향 길 1' 전문
위 시는 '<녹색평론> 김종철 선생님께'라는 부제가 붙은 작품이다. 여기에서 '길'은 고향 길이면서, 너나없이 우리 모두가 끝내 돌아갈 길이요, 참 아득한 길이기도 하다. '발문'을 쓴 김종철은 그의 시를 "충청도의 밑바닥 언어를 자유롭고 풍부하게 구사하면서 소위 근대화 과정에서 끝없이 소외당해온 사람들의 일상과 그 내면을 깊은 연민과 공감 속에서 애절하게, 때로는 해학적으로 묘파하는 뛰어난 시"라고 평하고 있다.
윤중호의 유고시집 <고향 길>에는 유독 스러져가는, 그리고 이미 사라져버린 고향의 풍경과 사람이 많이 나온다. 시 '고향 길'은 물론이고 '遠同里 獨居老人 朴氏 어르신' '전댕이 할머니' '황새말 당산나무 할아버지' '구장터 외갓집' '入寂' '金昭晉路에서' '나헌티는 책음감 있이 살라구 허시등만-이문구 슨상님께'등이 다 그러하다.
이미 고인이 된 소설가 김소진을 그리워하는 "그리움이야 오롯이 남은 우리들의 몫이라지만/기찻길 내려다뵈는, 이 자리쯤 어디에, 아직도/그 사내가, 물끄러미/밝아오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것 같아"('金昭晉路에서')라는 그의 시행을 읽는 우리는 시집 한 권 지상에 덜렁 남겨두고 먼 곳으로 가버린 시인 윤중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시집 <고향 길>을 두고 "역사상 가장 파괴적이고 어리석은 이 시대에 있어서 가장 근원적인, 그러면서 지금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이야기"라는 김종철의 지적은 의미심장하다. 끝없는 욕망 추구와 과소비, 속도만 중시하는 우리 사회가 삶의 생존마저 근본적으로 위협받는 이 시대에 시집 <고향 길>은 우리들이 모두 '돌아가야 할 길'을 보여주고 있다. 시집 맨 뒷장에 실린 시인의 육필로 된 미완유고시 <가을>이 필자의 마음밭에 건너와 계속 머물고 있다.
돌아갈 곳을 알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세요.
모두 돌아갈 곳으로 돌아간다는 걸
왜 모르겠어요.
잠깐만요. 마지막 저
당재고개를 넘어가는 할머니
무덤 가는 길만 한 번 더 보구요.
이. 제. 됐. 습.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