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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흑같은 밤 시골에선 아무 할 일이 없어 고역이다.
칠흑같은 밤 시골에선 아무 할 일이 없어 고역이다. ⓒ sigoli 고향
전라북도 처가에 갔을 때다. 밤 6시만 되면 저녁밥을 먹고 맨송맨송하게 잠자리에 든다. 심심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다. 맥주라도 한 잔 생각이 나지만 혼자서 홀짝거릴 수도 없다. 텔레비전을 보다가 잠자리에 들었는데 한 댓 시간 자고나니 밤 1시쯤에 깨고 말았다.

초저녁잠은 사람 몸에는 좋을지 몰라도 도시 생활에 익숙한 내겐 고역이다. 깨면 어두컴컴한 방에서 홀로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 텔레비전을 다시 켤 수도 없고 그렇다고 컴퓨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어르신 두 분과 친정에 왔다며 맘 놓고 잠을 자는 아내와 두 아이가 곤히 잠들어 있다. 그 어떤 소일거리도 찾지 못해 안달이다가 끝내 윗옷을 걸쳐 입고 싸늘한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워 물었다.

별이 총총 가로등만 몇 개 으스름하게 서있을 뿐 20여 호 되는 동네는 적막강산이다. 봄 여름 가을이라면 산책을 좀 하다가 돌아와도 되리라. 겨울이라 몇 발자국 떼지를 못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와 멀리 나갈 준비를 했다.

차에 올라 마당에선 전조등마저 켜지 않은 채 조용히 집을 빠져나가 읍내에 있는 PC방으로 향했다. 2시간여 인터넷 세계의 동정을 살피고 졸린 눈으로 십수 킬로미터 밤길을, 고즈넉한 분위기가 지겨워 아무데나 나오는 라디오 방송을 틀고 내달렸다.

절반 쯤 왔을까. 50여m 전방 좌측 산에서 두 개의 빛이 반짝였다. 불나방은 불빛에 연신 부딪히며 제 몸을 불태워 죽고 만다. 뭇짐승도 마찬가지다. 대체로 맹수는 불을 무서워하기도 하지만 초식동물에 가까울수록 불빛을 두려워하기도 하고 반대로 불빛에 빨려 들어와 나방처럼 맹목적으로 돌진하여 쉽게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

평소 시골 산길을 다니다 고양이, 토끼, 강아지, 노루, 족제비와 새들이 바닥에 깔려 마른 핏덩이와 함께 말라비틀어져 있는 걸 자주 목격하면 이맛살이 찌푸려지곤 한다. 늘 산길일수록 저속으로 가자고 다짐하지만 막상 도시를 빠져 나가면 힘껏 밟는 게 습관이 된다.

어떤 사람은 차에 깔린 동물을 구태여 다시 확인하고는 목숨이 조금이라도 붙어있으면 마저 숨을 앗아 고기 감으로 싣고 가기도 한다는데 참으로 모진 게 사람이다.

짐승이 엉겁결에 불빛을 보고 차에 뛰어들면 긴장한 탓에 운전자가 급제동을 하다가 전복되는 등 큰 사고가 나기도 한다. 평소 인적이 뜸하기로 유명한 전북 장수군 천천면에서 들짐승이 새벽 3시쯤에 쌍 라이트를 켜고 돌진하는 내 차에 뛰어들었다.

분명 두 눈에 불을 켠 꽤 큰 동물 한 마리가 산에서 내려와 텅 빈 논바닥을 달려 도로 위로 횡단을 한다. 눈 깜짝할 새 차에 붙을 지경이다. 분명 어릴 적 보았던 노루다. 순간 오른쪽 발을 밟았다. 오래된 차라 "끼익-" 소리가 났다.

어떻게 됐을까. 직방으로 박았나? 머리에 받쳤으면 그 자리에서 즉사할 수도 있을 속력은 충분하다. 놀라자빠져 앞에 턱 버티고 있으면 난감한 일이다. 멍한 시간에 멍멍한 일을 당하고 말았다.

"쿵" 소리가 한번 나고 고꾸라져 그 자리에 멈춰 있다. 내리지 않고 동정을 살피며 잠시 기다렸다. 침묵이 흘렀다. 휙 지나칠 것 같던 노루가 내 승용차에 살짝 닿는 느낌이 있더니 뒤돌아서 오던 길을 절룩거리며 되돌아가고 있었다.

"휴-"

시골 길에 두려운 건 귀신도 아니다. 외딴 곳에서 살아있는 무엇이 다가올 때 두려움이 극에 달한다.
시골 길에 두려운 건 귀신도 아니다. 외딴 곳에서 살아있는 무엇이 다가올 때 두려움이 극에 달한다. ⓒ sigoli 고향
어둠 속으로 사라진 짐승이 다시 쓰러지지 않은 걸로 보아 크게 다치지 않은 모양이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산에서 들렸다. 다행이다. 천만다행이었다. 현장을 수습할 것도 없었다. 마음을 다잡아 그 자리를 떠나는 게 내가 할 일이었다.

하마터면 칠흑 같은 밤에 혼자서 큰일을 낼 수도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죄를 지은 듯 온몸이 떨렸다. 미안해서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래도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상황인지라 마음에 걸려 느릿느릿 집으로 들어가니 없어진 나를 보고 "어디 갔다 오냐?"고 한다. 아무 말 없이 잠자리에 들었다.

몇 해 전 민박집을 운영하며 식용 개를 몇 마리 혼자 잡았던 일이 있다. 처음엔 잘 몰랐다. 마릿수가 늘어가고 횟수를 거듭하자 나에겐 놀라운 변화가 뒤따랐다. 흔히 '살이 떨린다'고 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개를 잡는 전날부터 밥맛도 없어지고 피가 고인 듯 멀쩡하던 사람이 근육까지 사르르 떨렸던 경험이 되살아났다.

아침이 환하게 밝아오자 걱정이 태산이었다. 밥을 주섬주섬 먹고 서울로 떠날 준비를 서둘렀다. 제발 해코지만 하지 않기를 마음으로 빌었다. 아이들까지 있는데 서울까지 오는 길에 변고라도 있으면 어쩌겠는가.

"여보…."
"왜요?"
"새벽에 장수읍내 갔다 오다가 승마장 근처에서 노루인지 고라니인지 모르겠는데 글쎄 내 차에 뛰어들더라고."
"아니, 그래서요?"
"나도 잘 몰라. 차에 부딪히더니 휭 되돌아가더라고. 우리 한번 가볼까?"
"그래요. 안 다쳤으면 좋겠네."
"가까우니까 잠시 주변만 한번 보고 서울로 가자고. 괜히 찜찜해서 도저히 그냥 못 가겠구만."

현장에 가보니 노루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 탈 없길 바라며 서울로 느리게 차를 몰았다.

덧붙이는 글 | 김규환 기자는 인터넷고향신문 시골아이 고향(www.sigoli.com)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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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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