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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쯤 헐은 돼지막에서 어른 키만큼이나 자란 돼지가 금세라도 훌쩍 뛰어넘어 바다로 다이빙을 해버려 설빔도, 꽃신도 다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릴까 싶어 이제나 저제나 돼지막을 기웃거리며 킁킁거리는 돼지의 심기를 살피는 나와 동생.
손에 복이 붙어 가금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길러내던 엄마 덕에 추석 명절, 설 명절이면 언제나 고향마당에서는 마라톤 출발신호처럼 명절을 알리는 돼지의 긴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곤 했다.
그 소리에 맞춰 우리들은 전복껍데기나 수저를 들고 펄펄 끓는 물을 잔뜩 둘러쓰고 누워 있는 돼지 곁으로 우~~하니 몰려들어 일제히 돼지털을 밀기 시작했다. 뽀얗게 드러나는 그 속살이라니. 그 속살 밑에는 꼬들꼬들 껍데기도 있고, 니글니글 비계도 있고, 탱글탱글 순대도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웃집 큰 아재는 진즉부터 커다란 '글라스' 잔에 소주를 가득 따라놓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간을 기다리고 있었고, 성질 급한 누군가는 보릿대를 들고 서서 공차는 시늉까지 하고 있었다.
양반 체면에 돼지 잡는 현장으로 선뜻 들어오지 못한 어르신 몇은 고향집 돌담 밑에 갈지자로 서성대며 "흠흠" 큰 기침만 연신 토해내고 계셨다. 빨리 끝내라는 신호였고, 빨리 국솥에 불을 댕겨서 얼큰한 국밥을 끓이라는 신호였고, 나도 여기 있으니 세상 없어도 내 몫은 남겨야 한다는 신호였다.
엄마는 참 인심이 좋았다. 자식들보다 더 챙겨 먹이고 거둬 먹여 키워서 잡은 돼지를 이웃들에게 헐값에 나눠줬고, 돼지고기가 팔리지 않으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대접이 철철 넘치도록 국밥을 퍼주며 그 누구의 가슴에도 설이 서럽지 않게 했다.
언젠가 한번은 멋모르고 큰방 아궁이에 국밥을 두 번이고, 세 번이고, 해가 꼬빡 지도록 끓여대던 통에 안방 장판이 새까맣게 타들어 간 적도 있었다. 그때도 체면상 마당에서 어우러져 먹지 못하고 안방에서 국밥상을 받은 동네 유지 몇 분이 이리저리 궁둥이를 들썩이며 피신을 하다 결국은 마당도 아닌 돌담 밑에서 보름달처럼 달뜬 궁둥이를 식혀가며 국밥을 비웠다.
그 일 때문에 아버지의 아궁이 놓은 솜씨가 동네에 소문이 나서 한동안 생업인 그물을 접고, 아궁이 기술자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내게 국밥보다 명절이 더 좋았던 이유는 바로 행여나 찾아올지 모르는 삼촌과 고모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평소에는 하루에 한 번 오는 것도 힘들어서 사흘이 멀다 하고 결항이 되던 여객선이 명절만 됐다 하면 겨울잠에서 깨어난 곰처럼 왕복 네 번도 가뿐하게 바다를 가르며 보고 싶던 얼굴들을 부두 가득 내려놓았다.
삼촌, 고모, 이모,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작은애기, 큰애기. 내려놓는 것이 비단 사람뿐만은 아니었다. 일 년 가야 구경하기도 힘든 컬러텔레비전이며, 어른 키를 훌쩍 뛰어넘는 별이 세 개 그려진 냉장고, 게다가 귀가 멍멍해지도록 육자배기가락을 뽑아놓을 커다란 전축까지. 도깨비 방망이같은 이런 물건들이 섬마을에 선을 뵈는 것도 거의 명절 때였다. 출세한 아들이 사 준 냉장고에, 시집 잘 간 딸이 사주는 컬러텔레비전. 부두에는 늙은 자랑이 더 늘어졌다.
하지만 크고 매정한 여객선은 한번도 내 앞에 내 삼촌을 내 고모를 내려주지는 않았다. 혼자서 넘어오는 고갯마루는 어째 그렇게도 가파른지. 고모가 왔다고 자랑하는 지각대장 영우의 발걸음은 어째 저리 팔랑개비같은지.
그래서였을까. 엄마의 꿈은 자식들이 얼른얼른 커서 명절에 사과 상자, 배 상자 앞세우고 여객선에서 일번으로 내리는 것이었다.
우리 집은 찾아오는 친척이 별로 없었다. 고모도 있고, 삼촌도 있었지만 돼지막을 둘러쳐서 값을 매기고, 국밥을 들고 우스갯소리를 하는 이웃들 외에는 나를 닮고, 아버지를 닮은 그 일가가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일가가 주는 용돈이 그리웠고, 일가가 사다주는 양말 한 켤레가 간절히 그리웠다. 친구들이 먹어보았다는 종합선물세트를 상상하느라 해 떨어지기가 무섭게 베개에 머리를 파묻던 그 잠충이가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는 그믐날 밤을 하품 한번 없이 지새우기도 했다.
명절날 아침이면 엄마는 거짓말쟁이가 됐다. 고모가 사서 보내준 청바지에, 삼촌이 사서 보내준 신발이 있었다. 그런데 그 옷과 신발이 왜 며칠 전 엄마를 따라 대목장에서 봤던 그것들과 똑 닮은 것이었을까. 삼촌이랑 고모 와서 먹을 거라고 창고 가득 만들어놓은 양갱이며 전들은 언제나 엄마의 한숨과 나의 기다림 속에서 식어갔다.
"다음부터는 떡이고, 전이고 하나도 안 만들란다. 묵을 사람도 없는디 고생만 직살나게 허고. 온다고 했으믄 와야지. 지달리는 사람은 생각도 안허고. 쯧쯧. 나가 미친년이다."
들어줄 대상도 없이 중얼거리던 엄마의 한숨이 들리는 듯도 하다.
어제 고향집으로 배 한 상자를 부쳤다. '웬만하면 한번 왔다가라'고 엄마는 부탁하셨지만 어째 한해 두해 나이를 먹을수록 고향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과는 달리 찾는 일이 자꾸만 어렵고 두려워지는지, 올해도 난 가지 못하는 서운함과 못 올 줄 알면서도 뱃고동이 울릴 때마다 목을 한발은 빼서 고갯마루를 넘어다 볼 부모님의 지리한 기다림을 배 한 상자로 대신해야 했다.
"요새는 과일이고, 떡이고 하도 흔해서 해놔도 묵도 안허고 올해부터는 참말로 암껏도 안할란다."
못가는 딸의 마음을 위로하느라 애써 시절 탓을 하는 엄마. 하지만 나는 안다. 올해도 엄마는 행여나 딸이 올 거라는 기대로 딸 좋아하는 곶감에 양갱에 가래떡을 줄줄이 뽑아 창고에 쟁여두고, 이장님이 틀어주는 구성진 니나노 가락에 맞춰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고갯마루를 쳐다 볼 것을.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내가 못 채운 그 자리를 올해도 넉넉한 오빠가 대신 채워줄 것이라는 것이다.
"엄마, 아부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딸이 없는 난자리 섭하다 한숨만 짓지 마시고, 손자 손녀 재롱 보시며 재미나게 보내세요. 내년에는 꼭 찾아뵐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