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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정에서 바라본 눈 덮인 산들은 근골(筋骨)을 뚜렷하게 드러냈다. 가까이로는 남산 건너편 계명산부터, 남쪽으로 눈을 돌리면 조령산과 월악산 연봉들이 살아 꿈틀거렸다. 단원 김홍도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의 세필을 세워 쳐나간 빳빳한 털처럼 능선과 계곡의 나무들은 단단한 뼈대를 세웠다. 오후의 햇살이 만든 능선과 계곡의 음영은 산 전체에 호피무늬를 덮어주었다.

충주시내에서 충주호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계명산과 남산이 서로 흘러내려 만나는 지점인 마즈막재를 지나야 한다. “종민동 나루에서 내린 죄인들이 충주감영으로 이송될 때 마즈막재를 넘어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고 하여 이름 지어진 마즈막재. 택시기사는 충주산성에 ‘편하게 가는 방법’으로 완만한 등산로를 권하였고, 마즈막재에 나를 내려주었다.

▲ 동쪽 성벽에 튀어나오게 설치한 사다리를 타고 동문으로 오르는 것부터 성 일주를 시작.
ⓒ 이용진
몇 날 며칠 내린 눈은 폭설의 흔적을 산 곳곳에 남겨놓았다. 새로 닦은 산복도로는 산허리를 굽이굽이 타고 올랐다. 충주호를 건너다보기도 하며 오르는 길은 완만하고 손쉬웠다. 결론부터 말하면, 충주 교현동 남산아파트에서 깔딱고개를 거쳐 정상에 오른 다음, 계명산이 마주보이는 북쪽 능선을 타고 마즈막재로 넘어가는 산행이 좋지만, 반대 코스는 덜 무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추천하고 싶기도 하다. 교현동 방면 등산로는 산을 오르는 묘미가 있는 반면, 경사가 비교적 심한 편이기 때문이다.

▲ 충주산성 동쪽 성벽.
ⓒ 이용진

전형적인 옛식 축성술의 寶庫

남한강과 그 지류인 달래강, 요도천 합류지점의 분지인 충주는 일찍부터 서울과 수운이 통하였을 뿐만 아니라 군사상 중요지점으로 삼국시대부터 서로 차지하기 위한 각축장이 되어 왔다. “조령을 잘 막으면 서울이 편안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중요한 곳이었다. 이러한 충주의 사방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충주시 직동 해발 636m의 정상에 험한 산세를 이용하여 돌로 쌓은 산성이 충주산성이다.

▲ 남문과 서문 사이의 성벽. 군데군데 무너진 흔적들이 보인다.
ⓒ 이용진

문화재청 홈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충주산성은 몽고군이 침입했을 때 몽고병을 물리친 곳으로 추정되며, 조선 고종 40년(1253) 9월 몽고가 제4차 침입을 감행하여 충주산성을 공격하자 충주 창정, 최수가 금당협에 매복하여 몽고군을 공격하여 승리하였고, 같은 해 12월에는 포위당한 지 70여 일에 군량이 다하고 사기가 저하되자 방호별감 승장 김윤후가 전군과 관노까지를 격려하여 사력을 다해 싸워 적을 격퇴하였다. 다음 해 2월에 김윤후를 감문위섭상장군으로 삼았고, 4월에는 충주를 승격하여 국원경으로 하였다. 1254년 9월에는 차라대가 충주산성을 공격하였으나 갑자기 비가 오고 바람이 불 뿐 아니라 성안의 고려인이 열심히 싸우자 차라대도 물러갔다. 몽고의 침입을 받아 전 국토가 유린되었으나 충주산성은 끝내 수호되었다.”

▲ 충주산성 동쪽 성벽
ⓒ 이용진
충주산성은 전설에 의하면 삼한시대에 마고선녀(麻姑仙女)가 7일 만에 축성하였다 하여 마고성(麻姑城)이라고도 하며, 금봉산(錦鳳山) 즉 남산(南山)에 소재하여 남산성이라고도 한다. 한편 백제 구이신왕 시대에 쌓은 것으로, 개로왕 21년(475)에 보수하여 적을 방어하였다고 전하기도 한다.

충주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이며, 외축 내착형으로 산 정상을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이다. 축성방식은 석재를 고루 쌓은 전형적인 옛식으로, 보은의 삼년산성과 비슷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1983년 충주시 조사에 의하면 성둘레는 1145m이며, 중간 중간이 무너지고 5개소에 775m의 성곽이 남아 있고, 성벽 높이는 7~8m에 이른다.

▲ 동문 성벽에 설치한 수구(水口). 정확한 복원을 위하여 해당 위치의 돌에 모두 번호를 붙여놓았다.
ⓒ 이용진
성 안에는 2개의 우물자리가 있으며, 동서의 산 능선에 문터가 있고, 동쪽으로 수구가 있다. 성안 지형이 대부분 경사지여서 건물자리가 없는 듯 해보이나 성 안팎에서 많은 토기와 기와 조각이 발굴되었고, 여러 군데에 건물자리가 있다.

보존 잘 된 수구(水口) 관심 끌어

충주산성에서 관심을 끄는 부분은 “석재를 고루 쌓은 전형적인 옛식”의 축성방법인데, 군데군데 무너진 성벽들 사이로 남은 성벽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반면 복원한 성벽은 이러한 축성방법이 반영되지 않은 듯 동일한 형태의 반듯한 돌들로 쌓아 놓았다. 이러한 방식의 복원이라면 보존만 하는 것보다 나을 바가 무엇인가. 이렇게 복원한 성벽이 돌축대와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 ‘옛식 축성술의 보고’라고 하는 충주산성의 진면목을 무너뜨린 결과만 가져올 뿐이다.

또 하나 관심을 끄는 것은 수구(水口)이다. 동문지 왼쪽 계곡 성벽에 설치한 수구는 서쪽 산정에서 동쪽으로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을 처리하기 위한 것. 수구는 위로 갈수록 안쪽으로 내어쌓기를 한 다음, 상단에 큰 판돌을 2단으로 겹쳐 올려놓은 사다리꼴 형태이다. 물이 떨어지는 수구 앞단에는 넓은 판돌을 성벽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놓아 떨어지는 물이 성벽에 닿거나 스며들지 않도록 하였다.

▲ 동문과 동쪽 성벽. 오른쪽 중간쯤에 우물터가 보인다.
ⓒ 이용진
<충북인뉴스>(www.cbinews.co.kr) 2005년 6월21일자 기사에는 수구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어 인용할 만하다.

“출수구를 통하여 안쪽을 들여다보면 판상석을 깐 바닥이 계단처럼 조금씩 높아지며 천장 또한 같은 방식을 취하여 출수구의 너비가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좁아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수구를 통하여 적이 침투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 같은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성내의 물이 바깥으로 빠지는 순서를 살펴보면 수구 안쪽의 좌우 차단벽→왼쪽 차단벽→도수로→입수구→배수로→출수구의 순서로 되어 있는데, 이같이 성벽의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계단을 통해 물이 흐르도록 만들어진 고대의 수구로는 보은의 삼년산성, 문의의 양성산성, 옥천의 성치산성이 이와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

동쪽 성벽 사다리, 성 일주의 시작점

산 정상 가까이 모롱이를 돌아 산성의 동쪽 성벽을 멀리서 마주하였을 때의 장중함은 보는 이를 압도하고도 남았다. 그 면모는 남북으로 뻗어나간 산맥의 연봉들의 기상을 닮았다. 성 일주는 복원된 동쪽 성벽에 튀어나오게 설치한 사다리를 타고 동문으로 오르는 것부터 시작하였다. 우물지를 살펴보고 경사진 성축을 따라 북문쪽으로 오른 다음, 비교적 평탄한 서쪽 성벽을 따라 도는 방향을 택하였다.

▲ 사과의 고장 충주답게 산 아래 사과밭이 많다. 눈 덮인 사과밭 너머 충주호가 보인다.
ⓒ 이용진
서문쪽 성벽에서 내려다보면 산 중턱에 크게 자리 잡은 석종사가 보인다. 석종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된 대사찰이었던 죽정사 터에 최근에 건립된 사찰로, 한국 서예계의 대가인 동강 조수호 선생이 '대웅전(大雄殿)', '오화각(五華閣)' 등의 현판과 주련을 휘호하여 서예계에 널리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산정을 둘러 본 다음 깔딱고개를 거쳐 충주 교현동 남산아파트 쪽으로 내려오는 하산길을 택하였다. 산의 운치와 등산의 묘미를 느끼기에 좋으나, 가파르고 미끄러운 눈길은 하산을 더디게 하였고, 산속의 날도 금세 저물었다.

▲ 충주 남산 정상 표지석. 충주산성은 해발 636미터의 남산 정상을 감싸고 있다.
ⓒ 이용진

덧붙이는 글 | <충주산성 가는 길>
충주까지 고속버스나 직행버스를 타고 가서 택시를 타고 남산 산행의 시발점인 남산아파트(약 3천원), 또는 마즈막재까지(약 5천원) 간 다음 산행 시작. 정상까지는 1시간 20분 정도 소요.
동서울터미널에서 충주까지 가는 버스는 오전 6시부터 오후 9시40분까지 20분 간격으로 있으며, 1시간 40분 정도 걸린다.

* 이 글은 한국토지공사 사외보 <땅이야기>에도 송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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