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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를 보면 누구나 떠오르는 한 권의 책이 있다. 바로 <갈매기의 꿈>이라는 소설이다. 나는 이 소설은 고등학교 때 읽었다. 한참 '나의 꿈이 무엇인가'라는 생각에 골몰에 있을 때 그 책이 내 손에 들어왔다. 그 책을 읽은 지 20년이 지난 지금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젊은 갈매기 조나단의 모습이 떠오를 뿐이다.
녹동항에서 갈매기들을 보자 나는 서점에서 갈매기의 꿈을 읽고 있는 20년 전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그 책을 서점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단숨에 읽어 버렸다. 무엇이 나를 그 책에 그토록 빠져 들게 만들었을까? 그것은 단지 꿈이라는 단어가 담긴 제목 탓이었을 것이다. 그 책 속에서 미결의 나의 꿈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른들은 내가 의사표현을 하기 시작하자마자 나에게 꿈을 물었다. 네 꿈이 뭐냐? 커서 무엇이 되고 싶은데? 어른들의 잦은 질문 때문인지 나는 꿈이라는 것이 어른이면 누구나 이루고 있고, 어른이 되기 전에는 누구든 정확한 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교에 들어가자 꿈은 반드시 풀어야 하는 중요한 수학문제처럼 다가왔다. 학년이 올라 갈 때마다 선생님들은 항상 꿈을 물었고 꿈을 쓰도록 강요했다. 하지만 꿈이라는 것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가? 도대체 왜 꿈을 이야기하라고 어른들을 말하는 것일까? 나에게는 겨울이 오면 봄이 오듯이 그런 의문이 자연스럽게 생겼다.
어른이 되어버린 지금 나도 가끔 아이들에게 꿈을 묻는다. "얘! 네 꿈이 뭐니"라고. 확실한 대답은 못하고 "네. 저…" 하고 말끝을 흐리는 아이들에게 그 나이 때에는 꿈이 있어야 한단다"라고 무의식적으로 말하고 있는 나를 보게 된다. 다행인 것은 아이들은 내 꿈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지 나만 그 아이들의 꿈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 아이들이 혹 나에게 "아저씨 꿈은 뭐예요?"라고 묻는다면 나는 달리 할 말이 없다. 뭐 특별하게 아이들에게 설명할 만한 꿈이 없기 때문이다.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아저씨 꿈은 말이야. "음…. 그저 행복하게 사는 것이란다." 그렇다, 이것이 나의 꿈이다. 행복하게 사는 것 말이다. 그럼 아이들에게도 행복하게 사는 것을 꿈꾸라고 할 것인가?
그렇다면 지금 아이들은 불행하다는 말인가? 웃으며 놀고 있는 그 아이들은 지금 이미 나보다 행복한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 그럼 아이들은 이미 내가 이루고자 하는 꿈을 이룬 것이다. 내가 그토록 이루고자 하는 행복한 삶을 이미 살고 있는 아이들에게 내가 꿈을 물을 자격이 있을까?
갈매기 조다난에게 꿈은 높이 나는 것과 빠른 속도였다. 하지만 진정으로 그가 원했던 것은 그 꿈을 통해 행복해지고 싶은 것이었을 것이다.
"모든 갈매기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나는 일이 아니라 먹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별난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먹는 일보다도 나는 일 그 자체였다" - 갈매기의 꿈 중에서
녹동항에서 만난 갈매기들은 조나단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먹는 일보다 나는 일"에 그리 노력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은 항구에서 사람들이 던져준 먹이를 받아먹거나 어선을 따라다니면 먹이를 구한다. 그들은 하루하루 갈매기에게 주어진 삶은 살아간다. 내가 보기엔 높이 날기 위해 노력했던 조나단보다 그들이 더 평화롭고 행복해 보인다.
녹동항을 떠나면서 생각해본다. 우리에게 꿈은 어떤 존재일까? 과연 꿈은 꼭 이루어야 하는 것일까? 과연 꿈이라는 것이 꼭 있기는 해야 하는 것일까? 어쩌면 이루지 못한 꿈 때문에 불행한 사람이 많은 것은 아닐까? 아마 꿈이라는 것이 꼭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지금 불행한 사람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꿈이 없으면 좋겠다는 다른 생각을 해본다. 가장 높이 나는 새는 가장 멀리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행복할 뿐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