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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선우의 사물들
ⓒ 눌와
시 '피어라, 석유'로 2004년 제49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한 젊은 여성 시인 김선우가 두 번째 산문집 <김선우의 사물들>(눌와,2005)을 펴냈다. 1970년 강원도 강릉 출신인 시인 김선우는 1996년 <창작과비평>으로 문단에 나왔고, 이미 두 권의 시집을 상재한 바 있다.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창비,2000)이 첫 시집이고, <도화 아래 잠들다>(창비,2003)가 두 번째 시집이다.

이 두 권의 시집에서 보여준 그의 시 문법은 직선적인 남성 시인의 상상력과는 사뭇 다르다. 여성성이라는 육체(몸)로 대 자연의 비경(秘境)과 생명(生命)을 탁월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가 즐겨 사용하는 시어로는 달과 대지(大地), 어머니(할머니), 젖(가슴), 음문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런 시어들을 갖고 그는 우주 생명의 본질과 관계망을 촘촘히 그려내고 있다.

앞서 언급한 김선우의 시 세계와 그 성격이 딱 들어맞는 산문이 그의 첫 번째 산문집인 <물밑에 달이 열릴 때>(창비)이다. 이번에 그가 새로 펴내는 두 번째 산문집 <김선우의 사물들>은 어느 격월간지에 3년 넘게 연재한 글들의 묶음집이다.

시인은 모두 20개의 사물들, 이를테면 숟가락, 거울, 의자, 반지, 촛불, 못, 시계, 바늘, 소라껍데기, 부채, 손톱깎이, 걸레, 생리대, 잔, 쓰레기통, 화장대, 지도, 수의, 사진기, 휴대폰이라는 사물들에게 그 특유의 말걸기를 시도하고 있는데, 이 말들을 통하여 세상과 너와 나의 소통을 이뤄내고 있다.

소설가 공선옥은 김선우의 사물에 이 말걸기를 어머니의 말이라고 한다.

"김선우의 사물들이 그렇다. 오래오래 생각하고 생각해서 힘겨웁게 나오는 어머니의 한 마디 한 마디 같다. 김선우가 오래 뜸 들여 내놓는 한마디 한마디에 나는 조용히 웃기도 하다가 조용히 눈물짓기도 하였다. 아, 김선우가 그다지도 강한 힘을 가진 사람이었구나. 세상에서 가장 강한, '말랑말랑한 힘' 말이다."


사물에 대한 김선우의 말걸기 한 부분을 인용해 본다. 책의 네 번째 꼭지 '반지-우주의 탁자' 끝 부분의 글이다.

"어린 날의 내 고향 바다가 나에게 준 가장 아름다운 환영幻影은 거대한 반지처럼 우주가 이어져 있다는 아득한 느낌으로 내 몸 깊은 곳에 새겨져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옛 사람들에게 반지Ring는 정신적인 것을 담는 둥근 그릇이며 정신적 종속을 서원誓願한 것이기도 했다. 이십 대의 어느 순간부터 나는 반지를 끼지 않게 되었다. 반지를 끼고 또 반지를 빼는 몇 번의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적인 함의를 담은 약속의 서원들이 지닌 덧없음을 알아버렸기 대문인지도 모른다. 대신 나는 약속의 말이 없는 반지를 낀다. 꽃과 바람과 조개껍데기와 태양과 달의 반지. 나의 정신이 자발적으로 종속되고자 하는 아름다운 반지들 속으로 내 왼속 약지를 내민다. 왼손 약지의 혈관과 신경이 심장과 바로 연결된다는 속설을 믿으면서 바닷가의 조개껍데기들과 윤회하는 바람의 링을 낀다. 그렇게 나는 바다와 혼인하고 산과 섬과 우주와 혼인한다."


사물에 대한 빼어난 묘사와 구체적인 이미지 육화가 선명한 그의 글을 읽는 즐거움을 이루 말할 수 없다. '바람의 링', '바다와 혼인하고 산과 섬과 우주와 혼인한다'는 표현은 얼마나 기발하고 거대한 상상력인가. '수의' 편에서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수의는 이 별에 처음 올 때 벌거벗은 맨몸이었던 우리가 지상에서 걸치는 마지막 옷이다. 그것은 마지막 옷이면서 동시에, 또 다른 저편 세계에서 막 태어나기 시작한 이의 최초의 옷이다. 죽음을 통해 순환의 새로운 마디에 들어선 이의 배내옷, 마지막이면서 처음인 옷, 그리하여 수의는 나를 향해 웃고 있는 또 다른 나 -'나들' 사이의 혼례복이다."


위의 글이 그렇듯 나는 김선우의 산문을 들여다보며 삶의 서늘한 뒷면을 보기도 하고, 잘못된 세상에 대한 울분과 분노를 가지기도 했다. 또한 그의 20개의 사물에 대한 말 걸기를 들여다보면서 나는 글쓰기의 충동을 강렬하게 받았다. 몇 편의 시가 곧 쏟아질 것만 같다. 그의 글을 읽으면 이렇게 기분이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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