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김정구 시인은 1953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고, 1981년 <포항문학>과 1985년 <시인>을 통해 등단했다. 등단 작품인 '화부'와 '신호수' 연작시는 포항제철에 근무하던 시인의 체험이 짙게 깔린, 현장성 강한 시편들이다. 김정구의 첫 시집 <풀무바람 속에서>(책만드는집, 1995)는 삶의 현장에서 건져 올린 싱싱하고 건강한 시편들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는 지역 문학 발전을 위해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마다 않고 실천해 왔다. 1987년 동인지 <이웃과 시>를 발간하였고, 또 '포항문예아카데미' 원장을 맡으면서 지역 문학의 텃밭을 훌륭하게 일궈냈다. 간암 판정으로 평생 다니던 직장을 그만둘 때까지 그는 '포항문학' 회장 일을 했는데, 그가 있어 '포항문학'과 포항지역 후배 문인들은 참 행복했었다.
김정구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1주년 기일에 맞춰 고인의 포항문학 후배들과 동료들이 뜻을 모아 유고 시집 <내 붉은 노래>를 펴냈다고 한다. 이는 우리 문단의 참 아름다운 소식이다.
눈이 붉은 동백을 보러
비 오는 선암사 돌계단을 오르면
앞서 디딘 그대 발자국이
내 가슴에 뜨겁다
진흙길 물 고인 발자리 마다
우리 꿈꾸던 한 세상 선연히 담겨 있어
곱구나
모른 채 살아 낸 그대 한 시절
작년에 잎 진 그 자리에
새처럼 향한 천년 그리움이랴
내 가는 그대 길 위에
그대 오는 내 젖은 눈 속에
만 년 고인돌이 일어서면
솟대도 더 높이 솟고
각황전(覺皇殿) 철불(鐵佛)의 맨손을 지나
흔들리는 목숨이 온다
붉은 봄이 맨주먹으로 운다
뻘강 상처를 덮는 하구에서
갈대가 온몸을 들썩이면
꽃나루(花浦)를 건너서
내 여윈 앙가슴을 치면서
그대가 온다
돌계단에 비치는 붉은 숨결
천년동백 그대가 온다
- 시 '천년동백' 전문
시 '천년동백'은 시인이 좋아해 생전에 남들 앞에서 자주 낭송하던 작품이다. 사실 나는 김정구 시인과 '포항문학' 활동을 함께 했고 그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던 후배 시인이다. 또 故 김정구 시인의 유고시집 발간 실무를 맡기도 했다.
지난 해 여름 고인의 컴퓨터 파일 속에 있는 유작(遺作)들을 찾아 정리하던 일과 최종 시집 원고를 서울 고요아침 출판사로 넘기기 전날 밤 유택(幽宅, '무덤'을 달리 이르는 말)을 찾아가 그간의 일들을 형께 말씀 전하고 맥주를 따라드리던 일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시집 맨 뒤편 '유고 시집을 묶으며'에서 나는 이렇게 형을 추모했다.
포항문학의 큰형이었던 김정구 시인의 유고시집 <내 붉은 노래>를 묶으면서 우리는 그가 '삿갓'이라는 별칭처럼 천상 시인이었음을 확인했다. 그것도 세상의 구들장과 우리들의 시린 가슴을 따스하게 데워주는 순도 높은 서정 시인이었음을. 생(生)을 마감하기 직전에 그가 쏟아낸 '붉은 노래'들은 하나같이 주옥같은 시편들이어서 중도(中途)에 끊어진 그의 노래가 너무도 아쉽고 아쉽다.
생전(生前), 고인과 문학 활동을 함께 해온 '포항문학'의 여러 식구들이 뜻을 모아 이 유고시집을 세상에 내놓는다. 이것으로 그를 떠나보낸 우리들의 슬픔이 잠시나마 달래질 수 있을 것인지. 그러나 그가 여기 부려놓고 간 말과 노래들이 있어 우리들 속에 늘 함께 자리할 것임이 분명하다.
나는 네게로 간다
무성한 여름 숲을 넘어
줄지은 가로수 옷을 벗는 그 사이로
오늘은
바람에 불려 땅을 덮어가는 은행잎처럼
나부끼는 햇살 순금의 깃발을 밟으며
흙 묻은 맨발로 간다
산수유 열매 불씨로 타는 가을 산을
밤길 더듬는 별이 되어 간다
침엽의 풍경 위에 눈 내리고
귀 먹은 계절에 시퍼렇게 치솟는 물보라
오래 얼어붙은 그 겨울 항구에
이 가을을 입히러 나는 간다
차디찬 네게로
- '가을 편지' 전문
김정구의 유고시집 <내 붉은 노래>는 높은 서정성과 시적 완결성이 높은 시들로 채워져 있다. 얼마 전 포항의 '포항문예아카데미' 문학강연회 끝 자리에서 정일근 시인이 고 김정구 시인을 추억하며 암송했던 '동행'을 비롯한 2부의 시편들은 높은 서정을 갖는 작품들이고,'저 산을 보며' '하현' '오래된 길' '여름산' '생금비리'같은 시편들은 시적 완결성이 뛰어난 작품들이다. 우리는 저 너머에 맨발로 가며 여기에 남겨 놓은 김정구 시인의 붉은 노래들을 오래도록 기억할 일이다. "산수유 열매 불씨로 타는 가을"이 오면 형을 다시 찾아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