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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먼타임스
(이재은 기자) "내, 실은 눈멀기로 말하면 타고난 놈인데, 그 얘기 한번 들어들 보실라우? 어릴 적 광대패를 첨보고는 그 장단에 눈이 멀고, 광대짓할 때는 어느 광대놈과 짝 맞춰 노는 게 어찌나 신나던지 그 신명에 눈이 멀고 한양에 와서는 저잣거리 구경꾼들이 던져주는 엽전에 눈이 멀고, 얼떨결에 궁에 와서는 어느 잡놈이 그놈 마음을 훔쳐 가는 걸 못 보고, 그 마음이 멀어져 가는 걸 못 보고…."(<왕의 남자> 대사 중)

<왕의 남자>가 관객동원수 1000만 명을 바라보며 새로운 문화 코드를 생산하고 있는 가운데 영화에서 보여지는 광대극을 계기로 고전 서민문학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죽은 공연'으로 평가되던 광대극, 판소리(창극), 탈춤, 줄타기, 인형극, 가면극 등이 복합된 고전극(서민희극)이 새로운 문화코드로 재평가 받고 있는 것.

영화를 본 관객들이 고전극에 감탄하는 이유는 고전 서민문학에서만 볼 수 있는 언어유희와 농도 짙은 풍자의 참 매력에 있다. '왕의 남자'에서는 주인공인 공길과 장생이라는 두 광대의 입을 통해 연산군의 폭정, 부조리한 양반사회, 가부장 문화 등의 시대상이 풍자된다. 영화 속에서는 '여자보다 더 예쁜 남자' 광대인 공기가 광대극을 통해 부패된 연산군 시대상을 비판하지만 상당수의 고전 서민문학에서는 여성 캐릭터를 통해 시대의 부조리와 모순 등을 까발린다는 것이 국문학 전공자들의 설명이다.

김혜진(29·이화여대 국문학 석사)씨는 "고전문학은 크게 양반문학과 서민문학으로 나눌 수 있는데 서민문학은 당시의 시대상과 서민들의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며 "특히 가면극 판소리 등의 서민문학에 등장하는 여성인물은 억제된 욕망을 분출하고 불합리한 사회구조를 비판하는 가장 진보적인 인물로 설정돼 있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고전 서민문학에서 두드러지는 여성인물의 활약은 조선후기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었던 판소리계 소설인 장끼전, 춘향전, 배비장타령 등에서 특히 잘 나타난다. 암컷 까투리의 말을 무시하고 고집을 피우며 콩을 먹으려다 덫에 치인 수컷 장끼가 죽자 수절을 무시한 채 바로 재혼하는 내용의 장끼전이 대표적인 예. 암컷 까투리는 남존여비와 개가금지로 규정된 조선사회의 유교도덕과 여성차별에 반기를 들며 허세를 부리다 죽음을 맞이하는 남편(남성 혹은 양반)을 풍자하는 진보적인 캐릭터다.

춘향전에도 춘향의 입을 통해 사회인습 및 기존 봉건사회, 양반의 이중성이 풍자된다. 자신의 연인인 이몽룡에 대해서는 한없이 순종적이고 관능적인 여성이지만, 변학도에게는 부패한 지방관의 횡포에 대항하며 민중의 대변인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판소리계 소설 이외에 풍자소설로 분류되는 배비장전, 이춘풍전, 옹고집전, 양반전도 마찬가지. 이춘풍전에 등장하는 여중호걸인 춘풍의 처는 무능력한 남편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도움을 주고 결국 남편을 개과천선하게 만드는 현명한 아내이지만 결코 순종적이거나 소극적이지 않다. 오히려 기생에게 빠져 있는 남편을 마음껏 조롱하고 비판하면서 시대의 남성상과 가부장성을 비판한다.

나약한 듯 보이는 여성 캐릭터의 입에서 쏟아지는 거침없는 풍자와 해학이 이춘풍전을 비롯한 조선 후기 풍자소설의 묘미로 평가되고 있는 것.

고전극에서 유일하게 여러 플롯을 가지고 있는 판소리계 소설은 광대들의 가면극을 통해 대중들에게 전파돼 민중의 현실 비판의식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했다.

'왕의 남자'를 통해 서민문학의 묘미와 매력을 깨닫게 됐다는 관객들의 호응에 힘입어 감춰졌던 서민문학을 바탕으로 한 공연들이 다시 부활할지 여부에 관심이 보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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