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복 시장에서 사온 신선한 오징어와 홍합을 손질하고, 커다란 압력 밥솥을 빌려와서 쌀을 안치던 때, 현관문이 열리며 낯익은 아주머니 한 분이 나타났다. 인사를 나눈 후 아주머니는 검정색 외투를 벗고 소매를 걷어 올리며 곧바로 주방으로 갔다. 데친 오징어를 채 써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동네 꼬마들인 노을이와 현주가 칼질을 하는 아주머니 곁에 붙어 서서 물었다.
“아줌마가 세계 최고 요리사에요?”
아이들에게는 그저 칼질을 잘하는 아줌마로 비쳤지만, 그는 바로 민주노동당 전 대표인 김혜경이었다. 지난 24일, 김혜경 전 대표는 강제철거를 앞둔 대추리에 '일일 주민'으로 방문했다.
지킴이 안내소의 찻집에서 장미차를 마신 후, '유빈이네' 집들이 소식을 듣고 찾아 온 것이다. 요리를 하는 그의 모습은 대추리의 여느 이웃집 아주머니와 다름없었다.
여섯 시가 조금 넘은 시각. 상도 없이 바닥에 명태전과 김치, 홍합탕과 마늘장아찌, 오징어회가 차려졌다. 여기에 평택 쌀로 지은 따뜻한 밥이 놓였다. 김혜경 전 대표와 평화바람 식구들과 노을이네, 마을주민들이 거실에 모여 앉아서 밥을 먹었다.
이유빈씨는 "차린 음식은 부족하지만 많이 와주셔서 기쁘다. 빈집마다 이렇게 사람들이 꽉꽉 찼으면 좋겠다"고 수줍게 웃으면서 말했다.
촛불행사는 매일 저녁 일곱 시에 대추분교 앞 비닐하우스에서 열린다. 촛불행사장에 들어가 보니 대책위에서 나눠준 초록색 담요를 허리에 두른 마을 주민들이 불 밝힌 초를 하나씩 앞에 두고 앉아 있다. 기름 난로를 켜두었지만 비닐 장판을 깐 바닥이 싸늘했다.
511일째 행사가 시작되고 가장 먼저 문정현 신부가 나와서 발언을 했다. "대추리를 반미반전의 성지로 만들자, 끝까지 꿋꿋하게 싸우자, 이 싸움을 이겨서 기쁘게 소를 잡는 날을 기다리자"고 기운찬 목소리로 말했다.
까만 모자를 쓰고 일일 주민으로 대추리에 온 오영숙 수녀님의 발언이 이어졌다.
"1년 동안 인터넷으로 평택 소식을 접했다. 수녀원에 오기 전에 이사를 두 번 했었는데, 이사 후에 늘 옛집이 그리웠고 그 동네에 가보고 싶었다. 지금 여러분은 하늘이 무너지고 세상이 캄캄한 마음이 아닐까."
오 수녀님은 "미국이 우리나라에서 막강한 힘을 쓰는 걸 두고 봐선 안된다. 평택 땅을 꼭 지켜내야 한다. 여러분의 힘이 결코 작은 힘이 아니다. 세상을 바꾸는 큰 힘이다. 무서운 일, 험한 일이 앞으로 닥치더라도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이 땅을 꼭 지켜내자"고 말했다.
가장 주민들을 기쁘게 한 이는 김혜경 민주노동당 전 대표였다. 대추리 도두리 일일 주민 1호인 그가 '음식 솜씨는 별로 없지만 대추리에 밥집을 열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을 때, 주민들 모두가 환호를 보냈다.
촛불행사가 끝나고 주민들은 서리가 내리는 밤길을 걸어 집으로 향했다. 평택 지킴이네로 가기 전, 오영숙 수녀, 김혜경 전 대표와 대추분교 정문 맞은편에 있는 찻집에 들러서 국화차를 마시며 짧은 대화를 나눴다. 연탄 난롯불을 쬐면서 이뤄진 인터뷰를 요약해서 덧붙인다.
- 3월경에 강제 토지수용이 예상된다. 민노당에서는 이것을 막아낼 대책을 갖고 있는가?
김혜경: "평택 문제가 중요하지만 실제로, 우선 사안으로 두지 못했다. 그러다 홍콩 WTO에 참가한 이후에 정말 미국 문제에 전 국민이 대응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중앙에서 그런 분위기를 만들 필요가 있고, 여의도 쪽으로 이슈를 가져와서 정치 쟁점화 할 계획이다."
-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 싸움에 어떤 조언을 하고 싶은가?
오영숙: "지금 여기 군부대가 들어서면 주민들은 당장 땅을 빼앗기게 된다. 주위에서 살아가는 주민들도 소음피해나 미군 범죄 같은 문제를 겪을 것이다. 이것을 평택 주민들에게 알려야 한다. 새만금 반대 운동을 할 때, 3보 1배가 큰 힘이 되었다. 문화 예술인들이 관심을 갖는 것도 좋은데, 일단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울릴 수 있는 뭔가가 필요한 것 같다."
김혜경: "어차피 미국 정부와의 싸움이고 미국과의 싸움이다. 아시아에서 미국주의를 반대하는 단위들과의 연대가 필요하다. 왜 한반도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가? 대만과 중국이 영토 문제로 싸울 때, 미국은 대만을 인정할 것이다. 미국이 그 싸움을 부추기고 군대를 파견하면 우리 군대도 뒤따르게 될 것이다. 중국과 대만, 일본을 잇는 미국을 반대하는 평화활동가들과의 연대가 필요하다. 이라크에서 전개되는 반미평화 운동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아시아 민중세력들이 대화를 나눠야 한다. 여기 주민들만의 힘으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 대추리에 와서 첫 느낌이 어땠나? 촛불행사에 참여한 소감은?
오영숙: "전에 대추리에 처음 왔을 때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학교 운동장은 어수선했으며 플래카드가 걸려 있는 등 전투 현장 같은 분위기였다. 오늘 촛불행사장에 가보니까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았는데 분위기가 아주 진지했다. '올해도 농사짓고 내년에도 농사짓자'는 그 구호가 너무 좋았다."
덧붙이는 글 | 김연주 기자는 평택 대추리에서 살면서 강제 토지수용에 맞서 우리동네 지킴이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