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 이번 설에 시골 안 내려가면 안돼?"
설거지를 서두르던 어머니는 한숨을 쉬고는 딸을 쳐다본다. 닦고 있던 접시를 던질 것 같은 '살기'가 느껴지기도 했지만 다행이 어머니는 다시 설거지를 하시며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는 추석에 못 봤던 친척들도 다들 온다고 했어. 할머니도 이제 연세도 많으시고… 안돼!"
정윤아(24·가명)씨는 코 앞으로 다가온 설이 괴롭다. 올 2월 부산의 한 대학을 졸업하는 정씨는 7개월 전부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지방 사립대학에다 적성에 맞지도 않는 인문계열 학과를 다니느라 학점도 좋지 않아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학부 전공으로는 일반 기업에 취직하기도 마땅치 않아 안정적인 공무원을 택한 것.
대졸신입사원 채용시장, 올해는 맑음?
경제 전문가들은 올해 '경기 회복'을 조심스럽게 점치고 있지만 대학졸업 예정자들의 취업 시장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대기업이 채용 규모를 늘리겠다고 했지만 신입보다는 경력직을 선호하고 있고 공기업은 지난해에 비해 14.8% 줄어든 1157명을 채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지방의 취업 시장은 더 좋지 않다. 한 취업 포털 사이트가 지역 중소기업 217곳을 상대로 조사한 올해 채용 계획에 따르면, 52%만이 사원 모집을 확정했다고 한다.
이렇게 고용시장이 불안정하니 졸업 예정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막연한 취업 준비뿐이다. 작년 12월 기말고사를 끝낸 대학생들은 공무원시험 등 각종 고시를 준비하기 위해 도서관으로 직행했다. 기자가 찾은 한 대학 도서관의 책상에는 대부분 행정학, 한국사, 9급 기출예상 문제집 등이 놓여 있었다.
정씨도 학교 도서관에서 매일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공부를 한다. 정씨는 "지난 추석 때도 취업 준비한다는 핑계로 내려가지 않았다"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지만 취업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친척들 보기가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특히 "사법고시도 아닌데 뭘 그리 오래 준비하느냐며 눈치를 주면 솔직히 견디기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친척들 "이제 졸업인데 아직 취업 안했어?"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05년 대학 졸업생의 취업률은 65%로 3년만에 큰 폭의 증가세를 기록했다. 이는 1983년 66.9% 이후 가장 높은 수치로 특히 여성 졸업생의 취업률은 62.3%로 통계 작성 이후 최고였다.
하지만 예비 졸업생들에게 이러한 회복 조짐이 확연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부산의 한 대학 조교로 있는 강아무개씨는 "과 정원이 40명인데 그중 10명만 취업했다"며 "나머지는 공무원 시험이나 임용고시, 대학원, 취업 재수를 생각하고 있는데 분위기가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예년에는 교정에 취업 성공을 알리는 펼침막도 눈에 띄곤 했는데 올해는 그것마저도 보기 힘들다"고 덧붙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졸업 예정자들에게 설 연휴는 악몽이나 다름없다. 올 2월 졸업 예정인 김아무개씨는 "예전에 소 팔아서 대학 보내던 시절을 생각하는 어른들은 아직도 대학만 나오면 쉽게 취업하는 줄로 아신다. 뒷바라지한 부모 심정은 알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대학 졸업 예정자 박지영(25·가명)씨는 지난 추석 때 악몽 같은 경험을 했다. 친척들에게 진로에 대한 질문 공세를 당했는데 박씨는 "노총각, 노처녀 보고 빨리 결혼해라는 얘기만큼이나 그 스트레스가 심했다"고 전했다.
취업 계획은 있냐, 애인은 있냐, 잘하는 게 뭐냐, 어떤 분야에서 일하고 싶냐 등 박씨는 "마치 공개 청문회를 하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박씨가 대학원에 진학할 거라고 적당히 둘러대자 그때 형부가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단다.
"처제, 요즘 고학력들이 넘쳐 나서 나중에 취업이 힘들 수도 있는데, 눈을 좀 낮추고 취업부터하고 경력을 쌓는 게 낫지 않을까?"
해가 다르게 치솟고 있는 등록금이며 고학력 실업자의 현실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박씨는 석사학위 따서 더 좋은 데 취업할 거라고 우길 수밖에 없었다. 그 주문처럼 박씨는 올해 같은 전공 계열의 일반대학원에 합격했다.
학업 연장이라기보다는 취업 유예 기간을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친척들을 만나면 대학원 학비 얘기가 나올까 걱정인 박씨는 "몸이 아파서 못 내려간다고 거짓말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이라 속이고...
설 전에 취업한 이광준(27·가명)씨는 명함이라도 돌릴 수 있어 그마나 사정이 나은 편이다. 퇴임이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 때문에 이씨는 취업을 서둘러야 했다.
다행히 방학 때마다 아르바이트를 하던 한 전자상가에 비정규직으로 일자리를 구했지만 친척들에게는 그냥 정규직이라고 얘기할 생각이다. 이씨는 "전공이 사회과학 쪽이고 장손이라 비정규직이라고 하면 실망이 클 것 같다"고 말했다.
반대로 1년 동안 캐나다 어학연수를 다녀오느라 졸업이 늦어진 최선미(25·가명)씨는 취업은 했지만 친척들에게는 비밀로 할 예정이다. 최씨는 "원하는 직장이 아니어서 떳떳하게 얘기 못할 것 같다"며 "다음 추석에는 꼭 좋은 일자리를 구해서 당당히 밝히겠다"고 말했다.
아직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김성재(28·가명)씨는 올해 설에는 고향에 내려가지 않는다. 자기 또래 다른 친척들은 대부분 취업했거나 결혼을 해서 자신에게만 관심이 집중될 게 뻔하기 때문. 김씨는 "그냥 남들처럼 공무원 공부한다고 대충 얘기할 수도 있지만 친척들의 관심이 불편하다"며 "나이가 나이인 만큼 할머니가 건낼 세뱃돈을 이제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도 고민"이라며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대처법 "원서 넣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작년 여름 8월 '코스모스'로 졸업한 강현정(24·가명)씨는 지난 추석 때 나름대로 대비책을 준비하는 등 철저한 준비를 했다. 현재 채용시장은 어떻고, 자신이 가진 재능이 뭔지, 어디를 목표로 하고 있는데 지원서를 넣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는 식으로 예상 질문과 답변을 준비한 것.
강씨는 "친척들 중에는 1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하는 사람도 많으니 그 순간만 제대로 대처하면 된다"고 다소 냉정하게 조언했다. 지난 해 겨울 취업해 사회초년생이 된 강씨는 "취업이 되지 않더라도 조급해 하지 말고 자신감을 잃지 않길 바란다. 오히려 주눅든 모습이 명절 분위기를 망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