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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사
삼척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인 한명희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내 몸 위로 용암이 흘러갔다>가 도서출판 세계사에서 나왔다. 1992년 <시와 시학>으로 등단한 그는 그동안 <시집 읽기>(시와 시학사·1996)와 <두 번 쓸쓸한 전화>(천년의 시작·2002)라는 두 권의 시집을 상재한 바 있다.

첫 시집과 두 번째 시집에서 보여준 한명희의 시 세계는 생기발랄하고 감각적인 시적 언어 운용과 그러면서도 삶의 쓸쓸함과 아픔을 껴안는 깊은 시적 통찰을 담고 있다. 이번에 새로 나온 그의 세 번째 시집 <내 몸 위로 용암이 흘러갔다>도 이런 그의 시 세계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불혹(不惑)을 넘어선 나이만큼 그윽하고 깊어졌다고 하면 시인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똑바로 걸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눈을 떠보니
마흔 살 나는 전혀 엉뜽한 곳에 와 있었다
엉뚱한 곳에서 이방인의 말을 하고 있었다

아무도 나를 통역해주지 않았다
- '이방인'전문


시집 맨 앞머리에 실려 있는 이 시는 한명희의 세 번째 시집 서시(序詩)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불혹(不惑)의 나이에 한명희가 삶의 뒷면, 그 서늘한 그늘을 봐버린 것인가. 시 '이방인'은 한계적 존재요, 단독자인 우리 인간의 운명을 간결하고 분명한 어조로 묘파하고 있다. 아무도 통역해주지 않는 나와 또 이 세상의 참된 말을 찾아 고행의 길을 떠나야만 하는 운명의 존재가 바로 시인이 아닐까.

그림은 오래도록 완성되지 않았다
아무리 기둥을 세워도 지붕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붓질을 할수록 그림은 초현실적으로 되었다
구름 위로 떠돌아다니는 집
집 속에 갇힌 나무들
집을 끌고 가는 바람
이제는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이 되어버렸다
-「불후의 명작」부분


위 시에서 '그림'이라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삶)의 상징(象徵)적 표현이다. 붓질을 하면 할수록 초현실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이 되어버린다고 시적 화자는 탄식하고 있다. 조금은 냉소적으로 붙여진 시 제목인 그 '불후의 명작'은 세간에 떠도는 말로는 영원히 그려지지 않을지 모른다. 불후의 명작을 찾아 고군분투하는 자의 피투성이 몸이 어쩌면 불후의 명작이 아닐까. 끝없이 길을 찾아 가고 또 걸어가야 할 일이다.

한명희 시인이 그동안 보여준 특장은 모순투성이 사회 현실의 단면을, 또 거기에 억지로 맞춰 살아가는 비굴한 삶의 단면을 냉소적으로 강렬하게 쏘아 올리는 시적 어법에 있다. 이번 시집에서도 '꽃방석이 있었다' '그들만의 리그' '왈가왈부' '아무려나' '걸어다니는 자'등의 시편들과 '불륜게임'이라는 부제가 붙은 다섯 편의 시에 냉소적 풍자의 칼날이 시퍼렇게 벼려져 있다.

그러나 나는 글의 앞머리에서 언급한 삶의 뒷면, 그 서늘한 그늘을 찾아 발버둥치는 한명희의 시들에 훨씬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내 몸 속 저녁' '어떻게 기억할까' '토로소' '서른여덟 줄의 요약'등의 시편들도 이와 같은 맥락의 작품들이다. 이것이 한명희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의 새로운 특징이라고 하면 안 될까.

덧붙여 또 하나의 새로운 모습은 사랑과 연관된 여성의 문제를 들고 나오는 시편들이 눈에 뜨인다는 점이다. "당신이 마신 술/내가 흘린 눈물--(중략)--온통 물로 만들어진/두 마리 물고기"('두 마리 물고기')에 나오는 당신, 이성의 그대 모습이 시집 속에 등장한다는 점이 한명희 시의 새 모습이다. 그러고 보니 '자서'에서 거듭 말하고 있는 '아브라카다브라'가 의미심장하다.

'아브라카다브라'는 마술사들이 사용하는 주문(呪文)으로 '말한 대로 될 것이로다'라는 뜻의 히브리어다. 나의 말과 그림을 찾아가는 주문이든, 사랑을 찾아가는 주문이든 이는 분명 한명희 시인이 새롭게 걸어갈 길임에는 분명하다. 그가 걸어갈 모습의 다음 행보가 무척 궁금하다.

내 몸 위로 용암이 흘러갔다

한명희 지음, 세계사(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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