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전통 현악기의 대표격이며 '가얏고'라고도 하는 '가야금'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이 가야금에는 익숙하지만 실제로 가야금이 무엇인지는 잘 모른다.
먼저 가야금은 좁고 긴 장방형의 오동나무 공명판 위에 명주실로 꼰 12개의 줄을 걸고, 줄마다 그 줄을 받치면서 쉽게 이동할 수 있는 작은 안족(雁足: 기러기 발 같다고 하여 붙은 이름)을 세워 놓았다. 연주자는 공명판의 오른쪽 끝을 무릎 위에 놓고 왼쪽을 방바닥에 뻗쳐 놓고 타는데, 오른손으로 줄을 뜯고 퉁기면서 왼손으로는 줄을 떨거나 눌러서 그 소리를 준다.
음색이 맑고 우아하며, 연주 기교가 다양하여 정악과 민속악에 두루 사용된다. 정악에 사용되는 가야금을 법금(法琴) 또는 풍류가야금이라 하며, 민속악 특히 산조에서 사용되는 것을 산조가야금이라 한다. 산조가야금은 19세기 말경 산조음악의 출현과 함께 생긴 것으로 법금보다 작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의하면 가야금은 가야국의 가실왕이 6세기에 당나라의 쟁(箏)을 보고 만들었다. 이후 우륵을 시켜 12곡을 지었는데, 가야국이 어지러워지자 우륵은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 진흥왕에게로 투항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4세기 이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의 토우(土偶)에서 가야금이 발견됐고, 중국의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삼한시대에 이미 한국 고유의 현악기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미루어, 가야금은 삼한시대부터 사용된 우리 겨레 고유의 현악기가 가실왕 때에 중국 쟁의 영향을 받아 더욱 발전했다는 것이 요즘 일반적인 인식이다.
이 가야금에 대한 연구에 몸바친 사람이 2004년 신라금을 재현한 데 이어 신석기 시대의 현악기를 1월 28일 재현해 연주한다고 하여 국립민속박물관으로 찾아갔다.
그는 바로 천익창씨로 가야금 연구와 개량에 일생을 바친, 어쩌면 가야금에 미쳤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그와 국립민속발물관과는 오랜 인연이 있다고 한다. 그는 1994년부터 국립민속박물관 대강당에서 연주를 해왔다.
연주 시작 전 대기실에 들어가 보니 천익창씨와 같이 공연할 그의 아들 천새빛군과 부인이 같이 있었다. 그는 돈이 되지 않는 연구와 연주에 골몰한 나머지 공연을 도와줄 사람 하나가 없었다. 악기와 기타 기재들을 직접 날라야 함은 물론 무대에 서기 위해 기본적으로 해야 할 분장마저 스스로 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그들은 무대에 선다. 맨 처음 시작은 이름하여 '천익창 재현 신석기 시대 현악기'를 아들 천새빛군이 신석기 시대 사람으로 분장하여 연주했다. 이름은 천익창씨가 붙인 가칭으로 청중에게 좋은 이름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도 잊지 않는다. 천새빛군은 신석기 시대의 토우에서의 형태처럼 가슴에 안고 연주를 한다.
신석기 시대 현악기는 악기의 모양새도, 악기의 음색도, 악기의 연주 모습도 생소하다. 또 음폭이 좁은 탓에 소리는 좀 단조로운 면이 있어 지루한 느낌마저 들었다. 물론 엄청난 세월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뿐만 아니라 6~7천 년 전의 것으로 짐작되는 악기에서 나는 소리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더 이상의 요구는 무리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재현된 악기가 실제 그 시대의 것과 차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연구자의 노력으로 그것을 재현했다는 것 자체가 큰 박수를 받을 일이란 생각이 든다. 그것도 세부적인 모습이 생략된 아주 작은 토우의 형태를 보고 재현한 것은 그의 집념이 어떤지를 말해 주고 있다.
신석기 시대의 현악기 연주가 끝나자 이번엔 천익창씨가 신라인의 복장을 하고 신라금을 연주한다. 이 신라금은 천익창씨가 2004년 일본의 정창원에 있는 것을 보고 재현한 것이다. 연주 모습은 양반 자세와 발을 뻗은 자세 등으로 변화를 준다. 그것도 토우를 보고 재현한 것이라고 한다. 신석기 시대 현악기보다는 음폭도 넓고 음색도 곱다.
다음은 천새빛군이 23현과 25현 가야금을 나란히 놓고 48현으로 '어린 시절'을 연주한다. 이어서 천새빛군의 48현, 천익창씨의 개량아쟁으로 '작은 폭포'를 공연했다. 그리곤 천익창씨가 분위기를 띄운다며 전자가야금으로 베토벤의 '환희의 찬가', 랩음악, 케니 지 음악, 새타령 등을 고루 연주하여 청중들의 큰 손뼉을 받았다.
비록, 대규모 공연장은 아니었지만 다수의 외국인과 함께 청중들의 호응은 결코 작지 않았다. 청중들은 섣달 그믐날인 까치 설날에 소중한 선물을 받았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것도 서양악기가 아닌 우리 고유의, 나아가 신석기 시대의 악기로 수천 년 전의 음악을 선물을 받았으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천익창씨는 미친 사람인지 모른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디 그렇게 돈도 되지 않고, 대단한 인기나 명망을 얻지도 못할 일을 30년 이상 해올 수 있을까? 그의 부인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었으며, 아들 천새빛군에게 아버지의 반이라도 미쳐 달라고 주문할 정도로 대단한 내조자였는데 그동안 얼마나 힘든 일이 많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제대로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 하더라도 그를 인정해 주는 부인과 그를 이어 개량 가야금 연주에 대를 잇고 있는 아들이 있는 이상 외롭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제사 지내러 가야할 시간이 늦었다며 재촉하는 아들에게 이끌려 내게 더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접는 그의 눈은 정말 순수함과 열정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 그와 그의 아들에게 우린 적어도 큰 손뼉 한번 쳐주는 것은 일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닐까?
나는 가야금에 대한 전문적 식견이 없는 상태여서 그의 말이 얼만큼 신빙성이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의 눈에서 진실성을 의심할 수는 없었다. 인터뷰 내내 그는 오직 가야금 사랑뿐임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열정이 우리 음악의 발전에 커다란 밑바탕이 되리란 믿음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 | 전국의 박물관을 수없이 드나들고 얻은 악기 | | | [인터뷰] 신석기 시대 현악기를 재현한 천익창씨 | | | |
| | ▲ 전자가야금을 연주하는 천익창씨 | ⓒ김영조 | | - 어떻게 신석기 시대 현악기를 재현했나?
"2004년 일본 정창현의 자료를 검토하여 신라금을 재현했다. 그런데 재현해 보니 끈이 달렸고, 5개의 고리가 있는 등 지금의 가야금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왜 그런 차이가 있는 것일까 하고 고민했다.
결국, 신라 사람들의 의생활을 연구해 보니 답이 나왔다. 조선시대의 갓을 쓰면 신라금에 달린 끈은 쓸 수 없고, 신라인의 상투 높이만큼 끈이 올라갔다.
그런 과정에서 전국의 박물관을 수없이 돌며 토우를 연구했다. 그런데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사람모양 토우'가 눈에 들어왔다. 그 토우는 가슴에 뭔가 널빤지 같은 것을 안고 있었는데 박물관의 학예연구관들도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했다.
가야금을 연구하는 내 눈에는 분명 그것이 악기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널빤지는 악기 모양은 분명했으나 줄이나 안족이 없었다. 그래서 그 토우를 직접 만들어보고, 줄을 끼어 보며, 안족을 대 보았다.
그런데 이것은 양이두도 없고, 현침도 없어서 줄을 맬 데가 없었다. 그래서 널빤지에 줄을 걸 수밖에 없었는데 그 방법은 줄을 고무밴드처럼 원통형으로 만들어 널빤지에 꿰었을 것이고, 널빤지의 넓이로 보아 5~7개 정도의 줄(현)을 끼웠을 것으로 생각을 했다. 결국, 이 현악기는 가슴에 안고 연주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기에 토우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 그런데 이 신석기 시대의 현악기가 신라금과는 모양에서 많은 차이가 있는데...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보면 가야금을 가야국의 가실왕이 6세기에 당나라의 쟁을 보고 만들었다고 했는데 나는 그것에 의문을 갖는다. 왜냐하면, 가야의 유물이 주로 소장돼 있는 김해박물관에는 악기와 관련된 유물이 전혀 없다.
하지만 경주에 가면 악기를 연주하는 형태의 토우가 땅만 파면 나올 정도라고 한다. 그걸 본다면 오히려 현악기는 가야보다 신라 문화의 주류 문화가 아니었을까? 따라서 나는 신라금이 우리 겨레가 신라 이전부터 오랫동안 전승해오던 악기 형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천여 년의 시간적 간격이 있는 신라금과 지금 가야금과의 차이는 많지 않지만 신석기 시대 현악기와 신라금과는 형태 차이가 상당하다. 그래서 4~5세기의 신라금에 비춰볼 때 지금 재현한 이 악기는 약 6~7천 년 전의 악기로 추정하며, 따라서 한반도 신석기 시대의 악기 형태일 것으로 생각한다."
- 2004년 신라금을 재현한 뒤 반응은 어떠했나?
"신라금을 재현하고, 여러 번 연주를 했는데 언론에선 상당한 관심을 표현했다. 문화방송 텔레비전의 '늘푸른 인생'(2005. 5. 8), 한국방송 1 텔레비전 역사스페셜 27회 '신라 주악토우 연주재현'(2005. 11. 11 방송)을 비롯한 여러 신문의 보도가 있었다. 하지만, 논쟁을 기대했던 학계에서는 아무 얘기도 없다는 것이 조금은 아쉽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