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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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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밭에서 능숙한 솜씨로 전지하고 있는 임혜숙 씨. 남편과는 영원한 동반자로 한 길을 걸어가고 있다.
포도밭에서 능숙한 솜씨로 전지하고 있는 임혜숙 씨. 남편과는 영원한 동반자로 한 길을 걸어가고 있다. ⓒ 이우성
그의 포도밭은 개폐식 연동하우스다. 비를 맞히지 않으니 균에 의한 병 문제는 해결을 했는데 벌레는 더 극성을 부렸다. 거창 웅양면에서 제일 먼저 친환경으로 포도농사를 시작했는데 벌레 때문에 엄청나게 고생했다. 특히 하루살이보다 더 작은 쌍점매미충은 매우 심각했다. 재작년에 칠레응애 천적을 2병 넣었는데 그 덕분인지, 먹이사슬이 잘 형성 되었는지 작년부터 벌레 문제도 심각한 정도는 면한 것 같아 안심이다.

포도밭에는 닭과 토끼, 오리, 거위가 자유스럽게 노닐고 있다. 벌레들도 잡아먹고 저희끼리 잘도 산다. 가끔 지인들이 오면 상차림에 올라오긴 하지만 부부 힘에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이들에겐 함께 농사짓는 친구와 다름없다.

전부 2500평 규모인데 그중에 1000평은 임씨가 마음대로 관리한다. 남편 정쌍은씨는 가격대가 좋은 블랙올림피아 품종을 하고 자신은 일반적인 캠벨얼리를 재배한다. 남편의 품종이 좀 까다롭다. 각자 맡은 곳에서 일을 하다가 힘에 부치면 부른다. 그러나 출하하고 소득은 모두 임씨의 통장으로 들어온다고.

여성농민회 일에다가 여성농업인센터 대표일을 맡아 농사 시간은 남편보다 훨씬 적다. 그래도 영원한 경쟁상대로 남편을 생각한다. 농사방식도 각자 달라 서로의 생각대로 키운다.

1년 수익은 4500만원 정도. 수확한 것은 모두 경남, 부산, 대구 등 한살림으로 나간다. 시설할 때 전업농자금과 농지구입자금으로 6000만원 정도 빚을 졌다. 그나마 빚더미에 안 앉은 것은 7년 정도 자신이 학원 강사를 하면서 그때그때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라고 웃는다. 가공공장도 작게 만들어 놓고 포도즙과 포도주를 가공해 판다. 늘 모자랄 정도라고.

포도농사는 15년째. 그 전에는 젖소도 기르고 배추, 감자, 팥, 고구마 따위를 길렀다. 시어머니와 함께 전부터 짓던 농사를 지었는데 그러다보니 시어머니 잔소리가 너무 많았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모르는 농사를 지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어머니와 영역을 나누었다. 시어머니는 콩과 팥 농사를, 자신은 배추농사를 지었더니 잔소리가 덜했다. 그러나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못했다. 농민운동 하면서 남의 돈 꾸러 다녀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먹고 살 궁리를 하다가 포도를 생각했다.

다들 일교차가 심하고 해발 550미터 고지대라 과수는 안 된다고 했는데 해보니까 당도도 높고 잘 되었다. 지금은 이곳도 포도와 사과농사 하는 농민이 많이 늘었다. 처음부터 친환경으로 했다. 운동하는 사람이 농약 비료 치고 농사지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특히 남편은 감각이 민감한 사람이라 농약을 아예 멀리 했다. 그러나 현실은 어려웠다. 맛은 있었으나 송이가 너덜너덜해지고 공판장에 가져가도 친환경은 뒷전이고 최하가격으로 나왔다.

내핍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보일러 없이 나무로 불을 때서 살았다. 다행히 아이들 교육비는 안 들었다. 1남1녀 아이들은 스스로 컸다고 할 정도로 놔놓고 키웠다고 미안해 한다. 딸은 경상대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 준비를 하고 있고 아들은 거창고를 나와 서울대 농대 2학년이다. 농대는 부모의 권유도 있었지만 스스로의 선택에 맡겼다고 한다.

평안도 실향민 부모를 둔 임씨는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만 자랐다. 남편과는 고려대 동기생. 자신은 사범대고 남편은 농대. 학교 다닐 때는 끝까지 경쟁하면서 맨날 싸웠다고 회고한다. 졸업 후 가톨릭농민회 여성분과에서 간사로 2년 일하다가 결혼을 하고 남편의 고향으로 귀농을 했다. 친정 부모님들은 의외로 잘 살라고 호응하고 격려와 축복을 해주었다고 한다.

“사대를 나와 선생을 하겠다는 생각은 애초 접었습니다. 당시 시대 구조에서는 선생이라는 직업이 선망의 대상이 아니었지요.”

선생을 하지 않은 것에 미련은 없었느냐고 물었더니 그땐 선생이 밥맛이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임씨는 선생을 한번 하긴 했다. 37살 때 농사를 작파하고 전국농민회 경남도지부 일을 열심히 하던 땐데 시어머니 잔소리가 극에 달했다. 못할 짓 안 하고 살자 정리를 했지만 점점 도가 지나쳐 참을 수가 없었다. 남편에게 이혼하자고 처음 말을 꺼냈다. 시어머니 돌아가신 후에 다시 만나자고까지 했다. 남편이 대안을 제시해주었다. 취직을 해서 집을 떠나 있으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거창읍내 학원에 취직을 해서 선생 일을 7년 정도 했다. 그 덕분에 농사로 파산을 면한 결과가 되었다.

오리, 거위, 토끼가 포도밭 한가운데 한가로이 노닐고 있다.
오리, 거위, 토끼가 포도밭 한가운데 한가로이 노닐고 있다. ⓒ 이우성
자신에게는 매우 스트레스를 주었지만 시어머니는 아이들을 잘 키워주었다. 마흔네 살에 난 아들이 남편이니 손자들은 얼마나 귀할까. 들로 데리고 다니면서 정서적으로 편안하게 아이들을 키워주었다. 아이들 육아와 교육문제는 농촌 아이들과 똑같이 했다. 한글도 모르고 학교에 들어갈 정도였다. 동화책 읽어달라고 하면 졸면서 제대로 읽어주질 못했다. 다행히 할머니의 푸근한 사랑 속에 아이들이 건강하게 커 주어 다행이다. 시어머니는 2년 전 돌아가셨다. 아이들은 방학 때 일을 많이 도와준다고. 한 10년만 험한 세상 맛보면서 남의 밥 먹고 시골로 오면 받아주겠다고 약속했다. 아들도 시골 들어와 농사지으려고 한단다.

남편은 도 농민회 일을 열심히 했다. 그러나 자신은 최소한으로 농민운동을 했다. 그때 처음 포도나무를 심었다. 그때 심은 4배체 품종들은 키우느라 골병이 많이 들어 캐 버리고 포도 고유의 맛이 있는 캠벨얼리 품종으로 바꿔 지금 심겨진 나무들은 7~8년생들이다. 4배체 품종은 포도알이 굵고 씨의 숫자가 적은 대신 생식능력이 떨어져 수정이 잘 안 된다. 재배기술이 필요한 품종이다.

임씨는 노후대책도 마련했다고 온 얼굴에 웃음기를 머금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포도주 공장을 집 옆에 만들어 놓았는데 그 옆으로 1500평 밭도 장만했다고. 노후에 양조용 포도를 재배할 땅이라는 것이다. 그 평수에서 나온 포도로 포도주를 만들어 노후를 보내겠다는 심사다. 농민에게 꼭 필요한 결과물을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도 얘기한다.

흙살림 유기인증을 받았다. 수확할 때만 외부 손을 사고 모두 부부 노동에 의지한다. 일의 역할을 어차피 나누어야 하니 능률적으로 일하기 위해 땅도 일도 분담을 한다고 한다. 작년에 남편은 자기 방식대로 하다가 낭패를 볼 뻔했다. 거봉은 꽃이 커서 꽃 만개 직전에 꽃을 반으로 잘라주어야 하는데 남편은 자르지 않고 고사리를 꺾으러 다녔다. 그러니 수정이 개떡같이 되고 말았다. 다행히 포도가 잘 익어 수확량도 그런 대로 나와 주었고 판로도 있어 수익은 괜찮았다. 뒷걸음질치다가 쥐 잡은 격이라고 웃는다.

초생 재배는 기본. 1년에 4~5번 풀을 벤다. 수세에 따라 호밀을 심는다. 거름은 캠벨은 평당 10kg 정도 뿌리지만 거봉은 10분의 1도 안 한다. 주로 근처 야마기시 양계 하는 곳에서 가져온 계분으로 한다. 병충해방제는 손으로 일일이 벌레를 잡아내는 것이 확실한 방제법이다. 거위와 닭에게 의존하기도 한다. 석회보르도액을 만들어서 치고 미나리, 쑥 효소를 담아 수시로 친다. 담배목초액도 효과적이다. 막걸리와 식초를 달곰하게 만들어 그릇에 담아 군데군데 놓아두기도 한다. 충집 등을 만들어 걸어놓기도 했는데 중국 멸강나방이 많이 온 때에는 오히려 돌발해충을 불러들여 고생이 많았다.

전지는 거봉은 강전정을 하면 수정이 안 되기 때문에 소목자연형으로 키운다. 나무 가고 싶은 대로 가게 두는 형식이다. 캠벨은 울타리식으로 일반 관행의 절반가량 적게 달리게 하는 것이 관건이다.

농사 틈틈이 여성농민 활동에도 적극적이다. 자신이 대표로 있는 거창여성농업인센터는 지역공부방과 여성농업인 고충상담, 보육사업, 방과 후 공부방, 농한기 문화활동, 교양강좌, 도농교류사업 등 지역실정에 맞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젊은 여성농업인의 농촌정착에 힘쓰고 있다. 여름 도농교류캠프와 11월 콩 축제를 열고 있다. 대외적인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고 인지도도 높다. 국고에서 1억을 지원받는데 보육사업에 다 들어간다. 3개 면의 중심에 영유아를 대상으로 어린이집을 운영한다. 정원이 40명인데 2005년에는 3000평 미만 농민 자녀에겐 50% 보육비지원을 했다. 도시의 저소득층 결손가정 아이들이 내려와 입학하는 비율도 50% 가까이나 된다. 교사 지원비가 많지 않아 고민이다.

농업에 대한 그의 생각은 단호하다. 곪으려고 할 때 소주 한잔 먹고 곪아 터지는 게 낫다는 것이다. 다 망하고 다시 시작하자는 자조 섞인 얘기가 오히려 간절한 호소로 들린다. 이제 곧 농민들이 독립운동가처럼 대접받는 날이 곧 올 것으로 진단한다.

'싸울 땐 싸우고 할 말은 하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잘 알고 걸어가는 사람, 그런 사람이 한없이 소중하다고 말하는 임씨야말로 큰 걸음으로 걸어가는 소중한 사람임이 틀림없다. 그는 이미 한국 농업의 한복판에 와 있다. 그의 소명이 그를 가만두지 않을 것을 우리는 안다.

가공한 포도주가 은근하게 익어가고 있다. 노후에는 임씨를 먹여살릴 소중한 자원이다.
가공한 포도주가 은근하게 익어가고 있다. 노후에는 임씨를 먹여살릴 소중한 자원이다. ⓒ 이우성

덧붙이는 글 | 포도밭 데이트 다시 하고 싶은 분입니다. 냉철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여성으로 살아가는 방식을 잘 가르쳐 주는 분입니다. 올해도 주렁주렁 이 분의 꿈처럼만 포도송이 잘 열리기를 바랐습니다.

흙살림(www.heuk.or.kr) 2월호신문에 함께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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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한그루 심는 마음으로 세상을 산다면 얼마나 큰 축복일까요? 세월이 지날수록 자신의 품을 넓혀 넓게 드리워진 그늘로 세상을 안을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낌없이 자신을 다 드러내 보여주는 나무의 철학을 닮고 싶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산다면 또 세상은 얼마나 따뜻해 질까요? 그렇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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