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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스트 서경식. <소년의 눈물>과 <나의 서양 미술 순례> 등으로 익히 알려진 그의 이름은 다른 작가들과는 달리 묘한 뉘앙스를 불러온다.‘재일조선인’이라는 신분 때문이다. 재일조선인이란 무엇인가? 쉽게 대답하기가 어렵다. 일제 시대 일본으로 건너가 돌아오지 못한 한국인들이나 서경식의 경우처럼 한국인의 핏줄로 일본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사는 이들을 말한다.
하지만 재일조선인이라는 단어는 그렇게 쉽게 정의되기가 어렵다. 경계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 질문해보자. 그들은 한국인인가? 아니면 일본인인가? 국가의 개념으로 본다면 그들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동시에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된다. 무슨 말인가? 한 핏줄 강조하는 한국은 해외동포들을 적극 껴안으려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럴 ‘필요’가 있을 때만 그렇다는 것이다. 일본은 어떤가? 참정권을 주지 않는다. 세금은 내지만 국민으로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 고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재일조선인이 죽었을 경우를 보자.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된다. 한국에서는 그들이 한 핏줄이라고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한민족으로 여긴다. 생전에 한국어 제대로 못한다고 이상한 눈초리로 보던 사람들도 그들이 죽었을 때에는 모두 용서해주는 건 도처에서 발견된다. 일본은 어떤가. 마찬가지다. <디아스포라 기행>에도 나와 있듯이 일본은 죽은 그들을 껴안는다. 생전에 참정권이 있든 없든 간에 말이다. 왜 이러한가. 서경식은 읊조린다. 소수인의 죽음조차 이용하려는 다수의 폭력이라고.
디아스포라. 본래 '이산'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이자 팔레스타인 땅을 떠나 세계 각지에 거주하는 이산 유대인과 그 공동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의미를 넘어섰다. 추방당한 자들, 다수에 의해 쫓겨나는 소수자들 모두가 디아스포라다. 재일조선인 서경식도 그렇다. 일본에서는 당연하거니와 한국에서도 ‘이방인’ 취급을 받는 서경식도 디아스포라의 고민을 안고 있다.
추방당한 자 서경식. 그는 <디아스포라 기행>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자신과 같은 디아스포라를 쫓았다. 재일조선인처럼 태생부터 디아스포라가 됐거나 혹은 다수의 이익으로 인해 억지로 디아스포라가 된 이들과 그들이 존재했던 곳을 찾아 세계를 돌아다녔는데 그 발걸음이 눈물겹다. 그들이 자신과 처지와 같음을 알기 때문이리라. 또한 발걸음이 실상은 그 누군가를 쫓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찾아다니는 것과 같기 때문이리라.
책 속을 들여다보자. 서경식은 누구를 쫓는가. 누구에게서 디아스포라의 모습을 발견했는가. 독일에서 고향 통영을 그리워하던 윤이상, 세계에서 인정받았지만 정작 국내에서 추방당하듯 외국으로 떠나야 했던 디아스포라가 있다. 1995년 서경식은 윤이상을 인터뷰하려 한다. 하지만 인터뷰는 성사되지 못한다. 대신 조문을 하게 된다. 그곳에서 영정사진을 본다. 그리고 평생 그리워했던 고향 통영의 항구가 내려다 보이는 파노라마 사진도 보게 된다.
김영삼 정부가 등장했을 때 윤이상이 귀국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갖게 된다. 윤이상은 얼마나 기뻐했을까? 그런데 날벼락 같은 소식이 들려온다. 윤이상이 베를린을 떠나기 전날 ‘과거의 행동을 반성한다’, ‘앞으로 북한과 절연한다’는 태도를 표명하라고 조건을 내걸었고 윤이상은 귀국을 취소한다. 역사의 이 장면을 떠올리며 서경식은 읊조린다. 망향의 심정까지 이용하는 잔혹감과 비열함을. 그리고 묻는다. 디아스포라를 향하던 그 폭력이 그때만의 것인지를.
브렌동크 요새에서 떠올린 유대인은 어떤가. 나치에 의해 핍박받은 유대인, 거리낌 없이 생체실험 당했던 유대인,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세계인들의 눈초리를 견뎌야 했던 유대인, 유대인증명서와 노란 별로 스스로 디아스포라임을 밝혀야 했던 유대인은 어떤가. 팔레스타인 난민도 있다. 역사축이 기막히게 변한 덕분에 핍박당했던 방법 그대로 핍박하고 있는 권력자들에 의해 쫓겨나는 팔레스타인 난민은 어떤가. 팔레스타인 난민뿐일까. 세계 곳곳에서 추방당하는 난민들 모두가 디아스포라가 아닌가.
“근대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해 세계 분할과 식민지 쟁탈전 이후, 전 세계에서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머금은 채 태어나 자란 땅을 뒤로 했을까”라는 서경식의 읊조림은 이성의 테두리를 둘렀지만 지극히 감정적이다. ‘서럽다’는 문자조차 사치스럽게 여겨지는 그들이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이리라. 더욱이 과거의 그것이 오늘에도 계속되고 있음을 알기에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디아스포라를 만나러 가는 길은 쉽지 않다. 근대 제국주의 국가들의 폭력들과 그것을 흉내 내는 오늘날을 직시하는 건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들의 마음을 엿보는 건 슬픈 바다에 몸을 던지는 것과 같다. 하지만 불편하다고 어찌 피할까. 디아스포라가 보통 명사화될 수 있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이 되는 건 타인만이 아니다. 어떤 이유로든 간에, 분명한 건 ‘자신’과 ‘우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얼 망설이랴.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그 소통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닐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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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기행 - 추방당한 자의 시선
서경식 지음, 김혜신 옮김, 돌베개(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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