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흰눈이 내려 우리들의 2월을 하얗게 만들었습니다. 조금 쌀쌀한 날씨이지만 2월의 하얀 눈은 싫지만은 않습니다. 하얀 눈길을 더듬더듬 달리는 자동차가 위태롭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귀엽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겨울의 끄트머리라는 여유가 만들어낸 안도감일 것입니다. 슬그머니 지나버린 1월의 아쉬움 탓인지 아니면 또 다시 시작되는 졸업 탓인지 많은 생각을 하도록 만들어 잠들지 못하는 2월입니다.
경술년 개해도 어느새 한 달을 넘겼습니다. 참,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각오와 다짐으로 시작한 새해이건만 내 손에 내 맘에 남아 있는 결과물들은 초라하기만 합니다. "사는 것이 그런 거"라고 나를 달래 보지만 갈수록 커지는 아쉬움은 어쩔 수가 없나 봅니다. 한 잔의 술로 맘과 몸을 달래보자는 앞에 앉아 있는 후배 선생님의 말에 귀가 솔깃하는 나를 발견하고는 나도 즐거운 미소를 속으로 속으로 거두어들입니다.
내 곁을 떠나는 학생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지난 3년 동안 정말 고생 많았다"라는 말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학생들이 진짜 많은 고생을 했지만 고생한 만큼 원하는 결과를 얻은 학생들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무엇보다도 앞서는 걱정은 혹시 내년 재수하겠다고 다시 응시원서를 들고 오지는 않을까? 우리나라에서 재수는 필수라고 안위하는 아이들의 어색한 웃음 속에서 발견한 것은, 바로 우리 같은 어른들의 '위선'과 '무책임'입니다.
다시 마음을 다스리고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바로 "인생은 에피소드의 연속이다"라는 말입니다. "작은 일들과 큰일들이 서로 씨줄과 날줄이 되어 엮어가는 것이고, 이번 졸업도 하나의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하다"라는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영어의 졸업식은 'commencement'입니다. 이 단어의 어원은 불어입니다. '개시와 시작, 최초'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장선생님들이 졸업식에 하는 말 중의 하나는 바로 "졸업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입니다"라는 말입니다.
생각해 보면 진짜 맞는 말입니다. 졸업은 하나의 과정이자 수많은 에피소드들 중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늘 우리는 새로운 마음으로 한 해 한 해를 대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살아보니까 그것을 조금 알겠더라구요. 한 번의 졸업이 절대로 인생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나를 합리화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세상은 절대로 직렬(直列)구조도 아니고 단선(單線)도 아닙니다. 복잡한 병렬(竝列)구조이고 복선(複線)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런 구조 안에서 하나의 성공적인 비결이 있겠습니까? 결국 상황에 따라 다 다르고 시간의 굴곡에 따라 다 다릅니다.
졸업생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바로 이겁니다. "지금 이순간이 인생의 모든 것은 절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기회는 많습니다. 그리고 지름길만 있는 것이 아니고, 돌아가는 길도 있고, 곁길도 역시 있습니다. 곁길로 가다가 우연히 얻은 빨간 딸기 맛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까? 딸기 한 알의 달콤함에 빠질 수 있는 여유는 절대로 지름길에서 가질 수 없습니다.
"포기는 배추를 셀 때나 사용한다"라는 말이 맞습니다. 실망도 마찬가지입니다. 실망은 순간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다시 시작하려는 최소한의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이런 마음가짐만 있으면 이 세상은 살아갈 수 있습니다. 순간적인 선택이나 기쁨 때문에 더 큰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혹시 기대보다 큰 결과를 얻은 학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보다 더 노력해야 합니다. 현재에 만족하는 사람은 '현재의 나'로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보다 조금 더 노력하면 오늘과 다른 나를 계속 만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인생에는 평탄한 길과 험한 길이 있습니다. 지금의 평탄한 길이 인생길의 내내 이어진다는 보장은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편안할 때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험한 길이나 복잡한 길에서 길을 잃거나 쓰러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미리 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비하고 준비하는 것보다 좋은 삶의 비법은 없습니다.
자! 이제 마음의 여유를 갖고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는 것도 필요합니다. 미래의 길은 항상 과거의 인생길에 그들만의 흔적을 남깁니다. 과거 없는 현재가 없듯이, 현재 없는 과거도 없고, 과거 없는 미래도 역시 없습니다. 모두가 소중한 인생의 일부입니다. 모든 시간들은 서로가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실타래의 실처럼 분명히 처음과 끝이 있습니다.
실타래를 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지혜와 끈기입니다. 이런 지혜와 끈기는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기쁜 경험과 슬픈 경험, 그리고 아픈 과거와 유쾌한 과거 여기에 즐거운 미래와 비전들의 기묘한 조화와 상호작용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현재의 고통과 괴로움도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달려온 인생길에서 조금만 비켜서서 자신을 돌아봅시다. 바로 거기에 미래가 있습니다. 진실한 삶의 가치가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노태영 기자는 남성고 교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