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김지연의 '찬바람이 불면', 김범룡의 '바람 바람 바람'을 흥얼거리던 세대다. 흔히 뽕짝이라고 하는 트로트와 랩이 등장하기 직전의 과도기에 사춘기를 보낸 것. 주로 음악은 라디오나 카세트 오디오를 통해 접했다.
안테나를 올려 주파수를 맞추고 가요를 듣다가 미리 넣어둔 녹음테이프에 잽싸게 녹음하는 센스도 잊지 않는다. 녹음한 곡은 몇 번을 되감아 가사를 적고는 연습을 한다. 헌책방에서 오백 원 주면 살 수 있는 최신가요 책을 사서 노래 연습을 한 적도 수두룩하다. 노래방이 없던 시절이라 가무의 욕구를 그렇게 해결을 했던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에 필이 꽂힌 적이 있었다. 일주일 이상을 그 노래를 몇 번이고 되감아 들었다. 아, 카세트 테이프의 아픔은 수명이 짧다는 것. 너무 많이 들은 탓인지 테이프가 늘어나버려 다시 들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어찌나 속상하던지, 눈물이 찔끔 날 정도였다. 최후의 수단으로 라디오에서 그 음악이 흘러나오면 녹음하리라 각오했던 기억이 가물거린다.
그러다 중학교 들어가서는 어머니를 졸라 워크맨을 샀다. 영어공부가 명목이었지만 등하교 길에 음악을 듣기 위해서다. 올드 팝에 한창 심취해 있던 사춘기 그 시절에는 'Sad Movie'와 'Let it be'를 좋아했다. 이른 아침, 귀를 매혹하는 그 음악들은 학교로 실어다주는 교통수단과도 같은 존재였던 것 같다.
그렇게 점차 음악은 나의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에 부응해 고등학교 때는 CDP를 사서 흡족해 하기도 했다. 비록 카세트 테이프에 비해 가격이 비싼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쥐꼬리만한 용돈을 쪼개 한 달에 한 개 산 CD를 친구와 바꿔서 듣기도 했다.
대학에 들어와서는 MD를 구입했다. 음악 사이트에서 듣고 싶은 음악을 마음껏 다운 받을 수 있다는 편리함, 이제 돈 주고 CD를 사지 않아도 된다는 만족감이 컸다. 점점 살기 편해지는 세상이다.
최근에 탱고와 왈츠에 빠진 나는 더더욱 음악에 대한 갈증으로 각종 인터넷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새로운 곡을 찾는다. 생각해 보면 음악을 음악으로만 들었지 음질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한 적이 없다. 그러다 작년 3월, 함정임 소설가와 <정보문화사>라는 출판사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주로 컴퓨터 관련 서적을 만들어내는 출판사인데 사장실 앞에 오래됐음직한 클래식 오디오가 한 대 놓여 있었다. 관심을 보이자 이상만 대표가 "이 전축이요 몇 년 정도 됐을 거 같아요?" '분명 저리 물으시니 오래된 것 같긴 한데, 어디서 저런 골동품을 구했을까' 싶어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이게 100년 정도는 됐을 거예요. 낡기는 했지만 소리가 남다르니 들어보세요."
그는 서재에서 가장 좋아한다는 클래식 LP를 꺼내 먼지를 털어내고, 톤암을 사뿐히 들어 올려 미세한 홈 위에 조심스럽게 바늘을 올려놓았다. 파이프 오르간 앰프에서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5.1채널 홈시어터의 빵빵한 음질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웅장함이었다. 카트리지 끝의 바늘이 레코드의 홈을 지나갈 때 먼지 때문인지 다른 홈으로 건너뛰기도('튀었다'고 표현한다)한다. 지직거리는 잡음이 그다지 나쁘지 않다. 오히려 그 잡음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함정임 작가가 한 마디 덧붙인다.
"우리 시절에 LP는 단지 음악 레코드의 의미만을 지니지 않았어요. 재킷에 그려진 복고풍의 밴드 사진이나 클래식 재킷에 그려진 유럽의 고적들의 그림들이 하나의 미술이기도 했죠. 음악을 듣다보면 자연스레 재킷의 그림이 떠오르고, 어쩌다 모나리자 그림을 보다보면 그 재킷의 음악이 떠오는 거 있잖아요. LP는 음악인 동시에 나만의 예술 세계였던 것 같아요."
오빠의 방 안에 몇 개 남짓한 LP 재킷을 품 안에 안고 음악을 들었을 법한 함정임 작가를 떠올리니 새삼 LP의 매력이 가중되는 듯하다. 비단 턴테이블의 등장이 몇 사람의 전유물로 그치는 것은 아니리라. 최근 들어 '마니아의, 마니아에 의한, 마니아를 위한 턴테이블'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서울 신촌과 홍익대 앞 음반가게나 청계천 상가 등에도 여전히 LP 단골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2000곡을 다운 받을 수 있는 아이팟과 동영상을 보며 들을 수 있는 MP3P가 출시됐는데도 LP를 찾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테크놀로지의 문명 혜택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뭔가 부족한 듯한 허전함을 느끼는 것일까. 오래된 트랜지스터 오디오는 IC칩으로 작동하는 요즘 디지털기기와는 다른 맛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일 터. 디자인이 투박하면서도 멋있고, 리모컨이 아닌 손으로 기계를 조작하고 판을 다루고 바늘을 올리는 손맛의 의미도 클 것이다. 음질보다는 처음 듣던 때의 추억이 되살아나는 느낌, 과거 속을 여행하는 듯한 그 느낌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디지털 노마드(Digital Nomad)의 입장에서는 촌스러운 것이 오히려 신선한 자극이 될 수도 있겠구나 싶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예전에는 거실에 놓는 가구 하나쯤으로 생각했던 턴테이블의 디자인에도 신경을 안 쓸 수가 없다. 파이프가 달린 클래식한 복고풍 트랜지스터부터 모던한 느낌의 오디오까지 다양한 모양으로 선보이고 있다. 디자인만 고려한 것이 아니다. 클래식으로의 회귀를 꿈꾸는 자들을 위해 LP, 카세트테이프, CD를 모두 들을 수 있는 올인원 오디오 시스템을 구축한 것. 수십 년 전 감각의 향수부터 최근의 깨끗한 음질의 최근 음악까지 선택하여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광속의 디지털시대 한쪽에서 유유히 명맥을 유지하는 아날로그의 세계. 이를 원하는 우리들을 위해 아날로그의 장점과 디지털의 편리함을 접합시킨 올인원 오디오가 등장했다. 추억을 곱씹게 만드는 올인원 오디오로 아날로그에 대한 추억을 살려 보는 건 어떨지.
덧붙이는 글 | Ennoble 잡지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