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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풍경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다릅니다. 봄에는 연두색이었다가 그 색이 짙어지면서 푸른색으로 변하면 여름이고, 붉어지면 가을이요, 붉은빛이 사라지면 겨울입니다. 봄 여름 가을이 소리 없이 천천히 변한다면 차라리 겨울은 요란합니다. 평소에는 검은색에 가까운 얌전한 녹색이었다가 오늘처럼 눈이 내린 날은 하얀색으로 돌변하기 때문입니다. 눈이 온 다음 맑은 날은 푸른 하늘과 대비되어 그 색이 한층 더해 눈이 부십니다.
노고단에 멈춘 시선을 아래로 낮추어 보니 화엄사가 보입니다. 화엄사는 특별한 추억이 있는 곳입니다. 난생 처음 낯선 사람과 잠을 잔 곳이기 때문입니다.
때는 첫 지리산 종주를 시도하던 대학교 1학년 여름이었습니다. 지리산 종주 중 화엄사를 찾았을 땐 이미 날이 어두워졌습니다. 그래서 등산은 다음 날로 미루고 화엄사 근처에 텐트를 쳤습니다. 지금은 계곡에서 야영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당시만 해도 계곡 좋은 자리는 모두 야영 가능 지역이었습니다. 저녁을 먹고 배낭 정리를 하는데 밖에서 누군가 부릅니다.
"안녕하세요."
"네"
"제가 텐트가 없어서 그러는데 오늘 하루 함께 잘 수 있을까요?"
불쑥 말을 건넨 사람은 30대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습니다. 텐트를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함께 잠을 자자는 것입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스럽더군요. 좁은 텐트 안에서 난생 처음 보는 사람과 잠을 잔다는 것은 낯선 그 사람만큼이나 낯선 일입니다.
남자끼리니 잘 수도 있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과 잔다는 것은 좀 이상한 일 아닙니까? 하지만 저는 그때 스무 살이었고 누구를 의심할 나이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밖에서 노숙을 하라고 할 수는 없어서 결국 동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일면식도 없는 사람과 지리산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죠.
남자는 예상대로 30대라고 자기를 소개했고, 집은 광주 어디 절이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스님이라고 하더군요. 무슨 일을 해야 할 것인지 머리가 복잡해서 아무 생각 없이 지리산에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린 언제 처음 본 사람이냐는 듯이 화엄사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그리고는 지리산 밤하늘에 별들이 가득 차서 더 이상 빈 곳이 없을 만큼 어두워 졌을 때 잠이 들었죠.
잠을 자고 있는데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이봐요. 이봐요."
그 남자였습니다.
"왜요?"
"일어나 봐요. 소쩍새 소리가 들려요."
낯선 남자와 하룻밤…이제는 경험할 수 없는 추억
고요한 지리산에 소쩍새 울음소리가 들리고 있었습니다. 곧이어 화엄사 종소리도 들려왔습니다. 그 남자는 자기가 소쩍새 소리를 들으면서 지은 시라면서, 시 한 수를 읊어주더군요. 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언뜻 듣기에도 초등학생 수준이었던 시를 남자는 아주 멋지게 낭송을 했습니다. 한여름의 풍부한 계곡 물소리와 화엄사의 맑은 종소리 그리고 처량한 소쩍새 소리가 고요한 지리산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 남자의 시 낭송 소리는 시 내용과 상관없이 노래 소리처럼 들려 왔습니다. 그리고 아침이 밝아왔습니다.
우리는 일행처럼 함께 아침준비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오랜 친구처럼 함께 밥을 먹고 지리산 종주에 나섰습니다. 등산을 시작한지 30분쯤 지난 후, 남자가 자기는 천천히 가겠다면서 연락처 하나를 주었습니다. 다음에 꼭 광주에 오면 연락을 하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그 남자는 화엄사가 멀어지듯이 저와 멀어졌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리산 종주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연락처는 지리산 자락에 버렸습니다. '산에서 만난 인연은 산에서 끝난다' 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리산이 앞산이 되어 버린 지금도 그 날 밤 그 남자가 불쑥 찾아와 동숙을 청했던 그 순간이 가끔 떠오릅니다. 아마 제가 거부했다면 그 남자는 다른 텐트에 가서 잤거나 노숙을 했을 것입니다. 대신 소쩍새 소리와 종소리 물소리가 만들어낸 새벽 화엄사에 대한 추억은 없었겠죠.
그 후로 십 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 제가 자고 있는 텐트에 불쑥 나타나 잠을 청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요즘은 지리산에 텐트를 치기도 어려워 모두 산장에서 잠을 자니 다시 그런 경험을 할 기회는 거의 없을 듯 합니다. 아니 텐트를 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찾아가 불쑥 잠을 청할 만한 사람도 없거니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믿고 함께 잠을 자도 될 만한 시대는 이미 과거에만 존재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오늘 눈 내린 지리산을 보면서 그 사람이 떠오른 것은 아마 서로를 믿고 살았던 그 시절이 그리웠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