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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을 며칠 앞두고 우리 사무실에 한라봉 한 상자가 선물로 들어왔습니다. 아주 급하게 이사를 해야 하는 총각에게 안성맞춤인 아파트를 중개하여 임대계약을 했는데, 고맙다는 마음으로 한라봉을 선물한 것입니다.
그날 사무실에 한라봉 몇 개만 남겨 놓고 집으로 가져갔더니, 딸아이는 단번에 한라봉을 알아보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저도 그때까지 단 한 번도 한라봉을 사 본 적도, 먹어 본 적도 없었습니다. 딸아이 또한 한라봉을 먹어 본 적이 없었을 텐데, 한라봉을 보는 순간 날아갈 듯 들뜬 목소리로 "와! 이제 내 소원이 2가지 남았다~"하는 것이었습니다.
딸아이의 그 말을 듣고 "은빈이 네 소원이 뭐뭐 였는데?" 물었습니다.
"제 소원이 3가지가 있거든요. 한라봉을 먹어 보는 것하고, 석류를 먹어 보는 것, 그리고 신화 콘서트에 꼭 참석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제 한라봉을 먹어 봤으니까, 2가지 남았네요."
딸아이의 너무나 소박한 소원 3가지에 저는 씩 웃으면서 "석류 먹어 보는 것이 무슨 큰 소원이라고…"하고 말끝을 흐렸습니다.
"엄마는 석류 먹어 봤어요?"
"그럼, 엄마 어렸을 때 우리 집에 석류나무가 있어서 먹어 봤지. 얼마나 시다구. 그래 석류는 나중에 엄마가 시장에 갔다가 눈에 띄면 사줄게. 그런데 신화 콘서트는 어떻게 갈 건데?"
"제가 꼭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입학해서 꼭! 보러 갈 거예요."
올해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가는 딸아이가 대학교에 입학하자면 앞으로 4년은 더 있어야 하는데, 그때 신화가 해체하면 어떻게 할 거냐는 물음에 딸아이는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고 자신만만하게 대답을 합니다.
몇 해째 신화를 혼자서 짝사랑하는 딸아이의 방에 들어가 보면, 지금도 변함없이 온통 신화 브로마이드로 가득 차 있습니다. 방문에도, 책상 앞에도, 머리맡 유리창에도, 침대 옆 벽에도, 심지어 엄마의 작은 액자를 가져다가 신혜성 사진을 넣어 책상 앞 잘 보이는 곳에 올려 놓았습니다.
지난 여름에는 용돈을 아끼고, 엄마의 흰머리를 뽑아주고 받은 돈을 보태 신화 CD를 구입했는데, 그 CD 안에 신혜성 자필 사인이 들어 있다고 얼마나 행복해 하던지요. 딸아이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렇게도 좋을까, 하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습니다.
사실 저도 딸아이만 할 때 좋아하는 가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행여 누가 눈치라도 챌까 봐서 마음으로만 소리 없이 좋아했습니다. 여자가수로는 패티김을, 남자가수로는 조영남을 남다르게 좋아했습니다. 그 가수들을 좋아한 이유는 아무리 높은 고음도 막힘없이 시원시원하게 뽑아내는 노래실력이 그 무엇보다 좋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가수들을 좋아한다고 누구 앞에서 자신있게 말해 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 가수들의 노래를 연습장에 받아 적어놓고, 혼자 골방에서 마치 내 자신이 패티김이, 그리고 조영남이라도 되는 양 온갖 폼을 다 잡아 가면서 노래를 부르곤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지금의 아이들은 자기 표현이 무척이나 당당하고 자유롭습니다. 자신이 누구를 좋아하는지, 왜 좋아하는지 그 이유까지를 이야기하고, 또 온라인상의 팬 카페에서 여러 가지 정보를 교환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솔직하고 당당함이 한편으로 부럽기도 하고, 또 꺼질 줄 모르는 그 열정이 은근히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신화 멤버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신상명세서를 모두 꿰고 앉았으면서도, 그 중에서 신혜성을 가장 좋아한다는 딸아이는 이름표에까지 아예 신혜성의 얼굴을 붙여 놓았을 정도입니다.
"은빈아~ 그런데 솔직하게 말해서 신혜성하고 너하고 너무 나이 차이가 많은 것 아니야?"하고 물으면, "엄마, 신혜성이요 띠 동갑도 괜찮다고 했어요"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야기합니다.
"엄마는 은빈이 네가 지금 그렇게 무작정 신화를 좋아하는 것보다, 신화가 너를 만나고 싶어 할 만큼 성공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으면 좋겠다. 지금 너는 수많은 신화 팬들 중에 한 사람일 뿐이잖아. 아마 신화나 신혜성은 홍은빈이라는 아이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를 걸?"
"엄마는 엄마 딸이 얼마나 팔방미인인지 너무 몰라요. 공부도 잘 하지, 그림도 잘 그리지, 영어도 잘 하지, 게다가 성격도 좋아서 친구들도 많지… 뭐 하나 못하는 게 있어야죠. 저는요, 꼭 서울로 제가 원하는 대학에 가고 말 거예요."
요즘 딸아이의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그런 거침 없는 자신감과 자유로움, 그리고 당당함이 부럽기조차 합니다. 그래서 마음 속으로 나지막한 소리로 딸아이에게 이야기합니다.
'그래 딸아 미리 할 수 없다고 체념하는 것보다,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이 무엇보다 중요하단다. 아무리 이루기 어려운 꿈일지라도 처음부터 그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고, 소중하게 가꾸어 가다 보면 그 꿈은 꼭 이루어지고 말 거야. 엄마는 네가 마음 속에 품고 있는 꿈이 어떤 것인지 비록 다 알지 못해도, 이루고 싶은 꿈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단다. 너의 꿈이 꼭 이루어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