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익(43) 전 민주노총 전북 부본부장이 지난 7일 교통사고로 숨졌습니다. 장례는 지난 11일 모교인 전북대에서 민주사회장으로 치러졌습니다. 이 글은 '고 조문익 민주노동열사 장례위원'인 전희식 시민기자가 올린 글입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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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머리로 사는 사람과 가슴으로 사는 사람으로 나눈다면 조문익은 어느 쪽도 아니다. 그는 머리와 가슴 둘 다로 살았다. 맑은 하늘 날벼락과도 같은 그의 죽음은 그래서 머리로 이해할 수가 없고 가슴으로는 찢어질 뿐이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의 죽음 앞에 선, 시커먼 작업복 사내들을 눈물 콧물로 울부짖게 한 사람이다. 형으로도 불리고 '무니기'로도 불리는 사람. 선생님으로도 불리고 노동자로도 불리는 사람. 혁명가라는 호칭이 참 따스하게 다가오는 사람. 차라리 사상가가 더 어울리는 사람. 조문익이다.
장례식장 추도사에서 염경석 민주노동당 전북도당 위원장은 자기는 왼팔이 아니라 머리통을 잃었노라고 했다. 친형 조창익씨는 동생이 있었기에 비로소 자기가 교사로서 해직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고 울먹였다.
서른 줄이나 되는 그의 긴 약력에도 나오지 않는 관계로 우리는 만나왔다. 명상수련모임이었다. 그는 야마기시 공동체 특강과 동사섭 수련을 했고, 노동자들의 각종 행사에 자기성찰 프로그램을 도입했었다. 노동운동의 거친 길을 가면서도 생명의 공동체를 꿈꿀 수 있었던 것은 사람과 세상에 대한 그의 꺼지지 않는 열정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다.
만날 때마다 그가 벌이고 있는 일은 새로웠다. 노동자들의 글쓰기 운동을 강조했다. 대안언론을 중요시하여 <참소리>를 만들어 운영했고 <열린전북>과 <부안독립신문>의 고정필진으로 활동했다. 폐교를 인수해 마을이름을 딴 '논실학교'를 만들어 한국 땅에 와 사느라 설움 많은 이주여성들을 돌보았다.
씩 웃는 특유의 웃음으로 세상을 꿰뚫어 내는 그가 노무현 정권 아래서도 감옥엘 갔다. 그의 아내와 면회를 갔는데 감옥은 그의 도서관이 돼 있었다.
아무도 살아 돌아 올 수 없는 길마저 찾아 나선 사람. 그가 조문익인 것이 못내 슬프다. 죽음으로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사람. 그를 떠나보내는 것이 아직은 슬프다. 이승에서 그가 도달할 마지막 길을 설레며 지켜보던 선배로서 그 길이 눈보라치는 캄캄한 빈 들판이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다.
덧붙이는 글 | <한겨레> 2월 14일자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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