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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을 열어 보니 비가 조금씩 내린다. 자동차 앞창으로 흘러내리는 빗줄기를 보며 구례를 벗어나 곡성군 석곡면으로 향한다. 구례읍내를 벗어나 5분만 지나면 바로 섬진강이다.
섬진강은 저 멀리 전라북도 진안에서 시작해서 순창을 지나 곡성, 구례, 하동으로 흘러간다. 구례와 곡성이 만나고 보성강과 섬진강이 만나는 지점이 압록이다. 압록은 작은 마을이지만 강과 강이 만나는 곳이어서 물고기가 많고 넓은 모래사장과 물이 얕아 사람들이 많이 찾는, 이 근처에서는 꽤 유명한 유원지다.
강과 사람이 오롯이 만나다
압록은 이번 '오마이뉴스 강사랑 마라톤 대회' 풀코스 반환점이기도 하다. 아마도 보성강이 섬진강을 만나듯 강과 사람을 만나게 하고 싶은 대회인지도 모르겠다.
압록에서 곡성군 석곡면은 자동차로 20여분 거리다. 가늘어지는 빗속을 따라 보성강을 거슬러 올라가니 석곡면 소재지가 보인다. 이번 대회는 석곡초등학교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인근에 주차를 하고 달리기 복장으로 갈아입고 나니 빗줄기는 더욱 가늘어진다. 아직은 늦은 겨울인데 비를 맞고 달리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싶지만 어느새 이 정도 비는 즐기면서 달릴 수 있는 마라톤 5년차가 되어 버렸다.
오늘 목표는 강사랑 마라톤 대회 하프 코스를 달려 보는 것이다. 인근 농민에게 강사랑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라고 권유하면서 코스 분석을 확실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가벼운 준비운동을 하고 석곡초등학교를 빠져 나와 다리 하나를 건넌다. 이 다리가 바로 목사동교다. 100m쯤 이어지는 다리인데 여기서 보성강과 처음 만나게 된다. 잠시 다리 위에서 강을 보다 보면 다리는 끝나고 시골길을 달리게 된다.
그리고 다시 언제 헤어졌냐는 듯 보성강과 다시 만나게 되는데 이 지점을 벗어나면 대나무 숲과 메타세콰이어가 양쪽에 심어진 운치 있는 길이 나온다. 여기가 첫 오르막이다. 낮은 오르막이어서 힘들지 않고 오를 수 있다.
굵어지는 빗방울, 그러나 선택은...
그 길을 지나서 논과 강을 끼고 달리다 보면 목사동 1교가 나온다. 목사동 1교를 건너면 강을 오른쪽에 두고 따라 달리게 된다.
5km 지점인 연화마을을 지나는데 빗줄기가 굵어진다. 빗줄기를 애써 외면하며 강과 시골 풍경에 취해 달려 보지만 어느새 옷은 축축하게 젖어버렸다. 앞으로 달려야 할 거리는 어림잡아 14km 정도다. 굵어진 빗줄기에 잠시 더 달릴 것인가, 아니면 돌아갈 것인가를 고민해 보지만 선택은 언제나 같다.
"그냥 달리자!"
비가 내리는 강은 무척이나 매혹적이었다. 안개가 자욱하게 내린 산은 보일 듯 보이지 않았고, 그 사이를 흐르는 강은 안개처럼 천천히 그리고 고요하게 흘러가는 것이었다.
강을 따라 달리는 코스의 장점은 평탄하다는 것이다. 강사랑 마라톤 대회 역시 코스 전체가 강을 따라 가기 때문에 높은 언덕이 없어 좋은 기록을 내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좋은 기록을 수립할 수 있는 코스다.
강은 밤새 내린 비에 콸콸거리며 소리를 내고 흘러간다. 발소리에 놀란 꿩 한 마리가 푸드득 날아오른다. 보성강 풍경에 취해 달리다 보니 어느새 죽곡면 사무소를 지나 태화교를 향하고 있다. 태화교는 하프코스의 반환점이다. 아무리 힘든 코스라고 해도 반환점을 돌고 나면 기운이 나는 법이다. 여기까지 오는 코스 중에 어려운 코스는 거의 없다.
강줄기 따라 유연하게 휘고 돌다
보성강은 직선화된 강이 아니라 자유롭게 흐르는 곡선의 강이다. 곡선의 강을 따라 낸 도로는 강처럼 유연하게 휘고 돌아나간다. 이런 완만한 오르막과 굴곡이 있는 코스는 지루함이 없어 달리기엔 안성맞춤이라고 할 수 있다. 강을 따라 연어가 바다로 갔다가 돌아오듯이 강물을 따라 하류로 갔다가 섬진강을 만나고 다시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것이다.
반환점을 돌아서 죽곡면 소재지에 이르니 뱃속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난다. 아침도 먹지 않고 달려서 그런 것 같다. 근처 슈퍼에서 간단한 먹을거리와 물을 한 병 사서 먹는다.
주인아주머니는 내 행색을 보고는 아무리 운동이 좋아도 그렇지 이 비를 맞고 달리느냐면서 잠시 몸을 녹이고 가란다. 마음은 고맙지만 내 행색이 어디서 편하게 쉴 수 있는 꼴이 아니다. 이미 흠뻑 젖어 버려서 온 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거리는 8km 정도다. 달린 시간은 어느새 1시간이 지나고 있다. 죽곡면 소재지를 지나면 낮은 언덕이 나오는데 경사도가 낮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 언덕을 지나면 목사동1교까지는 내리막이다.
언덕을 올라 내리막을 내려가는데 트럭을 타고 가는 아저씨가 자꾸 차에 타라고 한다. 괜찮다고 겨우겨우 돌려보내고 다시 달려 나간다. 아저씨는 비를 맞고 달리면 안 좋다면서 "선수는 몸을 아끼는 법"이라는 충고까지 해주신다.
"마음만 감사하게 받겠습니다. 빗길 운전 조심하세요."
강처럼 천천히 여유롭게 달리고 싶다
신나게 내리막을 내려오니 목사동1교다. 여기를 지나니 지친 몸에서 힘이 난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빗물이 땀과 함께 섞여 입으로 들어온다. 짠맛도 비맛도 아닌 비릿한 맛을 느끼며 신나게 달려본다. 운동화는 이미 젖은 지 오래여서 발을 내디딜 때마다 찰싹찰싹 소리가 난다. 하지만 달리는 기분은 상쾌하다.
물안개 사이로 멀리 출발했던 목사동교가 보인다. 이제 다 왔다. 힘내자. 다리에 묵직하게 근육통이 전해 오지만 이미 붙은 속도를 제어하기는 어렵다. 신나게 달려서 혼자서 골인한다. 혼자 참가한 대회에서 완주했으니 1등이다.
오늘처럼 강을 따라 달리면 강처럼 느리게 달리고 싶은 충동이 든다. 강처럼 여유롭게 천천히 말이다. 느리게 천천히 하지만 꾸준하게 간다면 보성강이 섬진강을 만나고 남해에 이르듯이 가고자 하는 곳을 갈 수 있다고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섬진강과 보성강 두 강을 만나 볼 수 있는 강사랑 마라톤 대회는 잠시 기록을 잊고 강물처럼 천천히 달려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또한 평탄하고 언덕이 거의 없기 때문에 기록에 욕심이 있는 주자라면 얼마든지 좋은 기록이 가능한 코스라는 점도 알아 두시기 바랍니다.
저는 2001년 춘천 마라톤에서 첫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했고 아마추어 마라토너의 꿈이라는 서브3(마라톤 풀 코스를 3시간 이내로 달리는 것)를 2004년 동아 마라톤에서 이루었습니다. 요즘은 기록보다는 즐거운 달리기를 하면서 보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