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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최종길 교수
고 최종길 교수
지난 1973년 혹독한 유신치하에서 '유럽 거점 간첩단 사건'과 관련해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다 의문사한 최종길(당시 서울대 법대 교수)사건에 대한 서울고법의 당연하지만 이례적인 판결이 신선한 놀라움을 주고 있다. 그 판결 내용은 국가는 유족들에게 18억4000여만원을 배상하라는 것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 배상판결의 함의는 그러나 결코 단순치가 않다.

1. 국가의 책임 우선 이 판결의 함의는 국가에 배상책임, 즉 고의·과실의 잘못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재판부는 "최종길 교수 사건에 대해 당시 중앙정보부가 사건을 치밀하게 조작하고 은폐했다"고 판시했다. 국가기관에 의한 조작ㆍ은폐의 진실을 뒤늦게라도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배상금 전액을 장학금과 인권관련 연구비로 헌납키로 결정한 유족들에게는 분명히 돈의 액수보다도 중요한 일일 것이다.

이 조작ㆍ은폐와 관련해 인혁당 재건위 사건 조사에 참여했던 한홍구 교수의 중앙정보부 내부 문서에 대한 열람사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는 1973년 10월의 최종길 교수 고문살인 의혹 사건 직후 중앙정보부장이 감찰실을 통해 수사 관련 부서의 수사 상황을 점검한 보고서를 찾아냈는데 거기에는 이런 기록이 적혀 있었다고 전한다.

"고문하고 있나?" "안 하는데요." (<한겨레21> 2006년 1월 3일)

무슨 영구와 맹구의 대화기록을 보는 것 같다. 물론 2002년 5월 의문사위에서는 최종길 사건에 대하여 '위법한 공권력 행사로 사망했다'는 조사결과를 공식적으로 발표했으므로 그 조작ㆍ은폐의 진실은 이미 세상에 드러난 것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법원의 판결은 사회적 삶 속에서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반드시 '법실증주의자'가 아니어도 그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예컨대 어떤 인간이 자연적으로는 생명체로 존재한다 해도 법이 그 생명체를 인간으로 규정하지 않으면 그는 법적으로는 인간이 아닌 무다. 간첩이 아니어도 법이 누군가를 간첩으로 규정하면 그는 그 순간부터 법적으로는 간첩이다. 우리의 어두웠던 과거사 문제를 법적으로 확인하는 작업을 단순히 세상을 규정하는 법의 눈에만 집착하는 것으로 볼 이유는 없다.

항소심 재판부보다 소심한 여당과 정부

서울고법 민사5부는 14일 유신시절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다 의문사한 고 최종길 교수의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항소심에서 원고 일부승소 판결했다. 사진은 고 최종길 교수의 유가족과 변호인이 지난해 26일 국가를 상대로 냈던 손해배상소송에서 패소했을 당시의 기자회견 사진.
서울고법 민사5부는 14일 유신시절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다 의문사한 고 최종길 교수의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항소심에서 원고 일부승소 판결했다. 사진은 고 최종길 교수의 유가족과 변호인이 지난해 26일 국가를 상대로 냈던 손해배상소송에서 패소했을 당시의 기자회견 사진. ⓒ 연합뉴스
2. 시효문제 국가의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기간은 민법상 '그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 불법행위를 한 날로부터 10년'이며, 예산회계법상 시효소멸기간은 5년이다. 1심 재판부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검찰에 진정한 88년 이후에는 장애가 사라졌다고 본 반면에 항소심 재판부는 유족들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발표가 있는 2001년 이전까지는 손해배상을 청구하기 어려웠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항소심 재판부는 1심 재판부와 비교해 단순히 이 사건의 소멸시효 계산문제에 대한 의견차이만을 보인 것이 아니었다. 재판부는 "피해를 본 국민들에 대해 정정당당하게 불법행위 자체가 있었는지를 다투는 것은 몰라도, 소멸시효가 완성됐다는 주장을 내세워 그 책임을 면하려고 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방어 방식이라는 점에서 국가의 소멸시효 항변은 허용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지난 보도(<한겨레>, 2006년 1월19일)에 따르면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반인권적 국가범죄의 공소시효 문제에 대해 현재 공소시효가 남아 있는 범죄에 한해 가해 공무원이 퇴직할 때까지만 시효를 정지시키기로 했다. 공소시효가 지난 혹은 공소시효가 남아 있는 반인권적 국가범죄에 대해 공소시효를 배제할 경우 위헌 논란이 제기된다는 점을 감안해 이를 채택하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는 최종길 사건의 항소심 재판부 입장보다도 크게 실망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한 대법원의 명확한 판례는 아직 없다. 다만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1995년에 제정된 5ㆍ18특별법에 관한 헌법재판소의 아주 중요한 결정을 참조할 수 있다.

헌법재판소는 5ㆍ18 특별법을 통한 전두환 등의 처벌은 "공소시효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보는 경우"(부진정소급)에는 가능한 것이라며 재판관 전원이 합헌의견을 냈고, "공소시효가 이미 완성된 것으로 보는 경우"(진정소급)에도 4명이 합헌, 5명이 한정위헌 의견을 냈다. 그러므로 결국 위헌결정 정족수 6인에 미치지 못하여 합헌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후자, 즉 '진정소급' 입법의 경우에도 위헌이라고 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특별히 유의할 필요가 있다. 정부와 열린우리당 안이 너무 소심해 보인다.

3. 유사사건의 처리 그렇다면 이제 과거에 일어났던 모든 유사사건에 대해서도 똑같은 판결을 기대할 수 있을까? 수도 없이 많다. 확정된 패소판결 외에 현재 거론되고 있거나 진행 중인 사건만 열거해도 조봉암 사건, 동백림 사건, 박영두 사건, 함주명 사건 등등이 해결을 기다리고 있다.

다만 지금 문제는 시효문제에 대한 명확한 입법이나, 대법원 판례 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사건 각각의 판결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외에 달리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번 판결을 환영하는 법전문가들도 법정책적 상고를 통해 확실한 대법원 판례를 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에서부터 국가가 시효주장을 포기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한다는 주장까지 각양각색이다.

그러나 이미 확정된 패소판결 사건을 포함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입법을 통한 해결이다. 정부와 열린우리당이 걱정하고 있는 위헌여부는 입법 후 기본권 침해를 주장하는 당사자들의 이의제기가 있을 경우 헌법재판소의 판단에 따르면 된다.

혹 국민 중에는 '국가의 반인권적 범죄는 소멸시효 없이 국가배상 등 책임을 감수해야 한다'는 특별입법을 제정할 경우 자신이 낸 세금이 위헌적으로 사용된다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나는 국가의 반인권적 범죄행위로부터 역사 속의 국민들이 겪은 역사적 고통은 과거 잘못을 저지른 정권이 아닌 현재의 정권이 현재의 국민이 낸 세금을 사용해서라도 반드시 충분히 배상하고 그 배상의 의미를 현재 속에서 되새겨야 한다고 믿는다.

역사 속 희생자 보상은 온국민의 참회의식

나는 역사 속 희생자들에 대한 이러한 국가배상은 국민의 세금을 매개로 온 국민이 참여하는 일종의 참회의식으로 본다. 과거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라면 역사적 죄와 고통을 나누는 의미가 될 것이고, 그 시대를 살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미래에 대한 역사적 다짐의 의미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입법에 있어 한 가지 더 고려할 사항이 있다. 정부와 열린우리당 안은 시효배제 범죄대상자를 "국가의 소추권 행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공무원으로 한정"했지만 그 범위를 더 확대할 필요가 있다. 역사적 경험은 반인권적 범죄행위는 반드시 권력자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명령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란 것을 보여준다.

아무리 순응적인 개인도 권력자의 명령이 반인륜적 범죄인지 아닌지를 구별한 능력은 충분히 있다. 자신이 저지른 범죄행위에 비하면 보잘 것 없을 자신의 조그만 이익을 지키기 위해 그토록 잔인한 하수인 노릇을 하는 사람들의 민ㆍ형사적 책임도 반드시 시효 없이 물어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역사 속에 다시 등장할지도 모르는 맹목적 하수인들에게 나쁜 행위동기를 부여해서는 결코 안 된다.

오는 3월이면 고 최종길 교수가 의문사한 옛 안기부 본관이 유스호스텔로 개ㆍ보수돼 개관된다고 한다. 이곳에 머무를 젊은이들은 최종길 교수가 겪었던 과거 역사의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청춘을 누릴 것이다. 역사는 이렇게 흐르고 있다. 그러나 어둡고 고통스러웠던 역사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우리들의 참회와 다짐을 통해서만 치유되어 내일을 향해 흐른다는 사실을 기억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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