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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가 저물어가는 마지막 날인 2005년 12월 31일, 저는 아주 커다란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동안 마음으로 생각하면서도 실행에 옮기지 못한 우리집 2개의 TV 코드를 과감하게 뽑아 버린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방학을 맞이한 아이들이 잠시도 TV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서 꼭 해야 할 자신들의 일까지도 하지 않는 일이 허다했기 때문입니다. 케이블방송에서 멈추지 않고 방영되는 국적불명의 만화영화에 푹 빠져 버린 아이들의 모습에서, 뭔가 특단의 조치를 내려야겠다고 내내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 또한 즐겨보는 드라마가 몇 편이 있었기에,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새해를 맞이하는 시점에서, 언제까지 단순하게 마음으로 생각만 하는 엄마가 아니고 행동으로 보여 주는 엄마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에 아이들에게 아주 강력하게 선언을 했습니다.
'우리 이제부터 새로운 마음 자세로 한해를 맞이하자. 엄마도 좋아하는 드라마가 있고, 꼭 보고 싶은 방송이 있지만 너희의 본보기가 되기 위해서 TV 시청을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아이들도 처음에는 쉽게 동의하지 않았지만, 엄마가 팔을 걷고 솔선수범을 하는 데 어쩔 도리가 없는지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맨 처음 거실에 있는 TV의 코드와 유선방송 코드를 뽑았습니다. TV의 덩치가 적지 않기에 아이들이 코드를 꼽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그리고 안방의 TV도 유선방송 코드를 뽑아 버려서 TV시청이 불가능하게 해 버렸습니다. 단지 안방 TV를 통해서 DVD나 비디오시청만 가능하게 했습니다.
한해가 저물어가고 새로운 한해가 밝아온다는 그때, 저희 집은 TV시청을 하지 않은 까닭에 유난히 조용한 한 해를 보내고, 맞이했습니다.
처음 며칠 동안 아이들은 TV를 앞을 떠난 후, 갑자기 생긴 많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할지 당황하는 듯 보였습니다.
아들아이는 괜히 이 방 저 방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저희끼리 유난히 토닥토닥 다투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들에 손을 뻗치기 시작했습니다.
평소 책 보기를 돌같이 하던 아들아이도 60여 권이 넘는 만화 삼국지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습니다. 또 딸아이는 엄마가 미혼시절에 읽었던 '숲속의 방'이나 '핏줄' '가시나무새들' 등을 읽는 듯했습니다.
저 또한 퇴근 후, 저녁 식사를 마치면 설거지도 하지 않은 채 리모컨을 찾아들고 침대에 누워 TV를 켜던 오랜 습관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제때에 설거지를 마치고 식탁 의자에 앉아서 책을 읽기도 하고, 또 오랜만에 편지를 쓰기도 했습니다.
TV소리가 사라진 집안에 아들아이는 라디오를 켰습니다. FM의 음악프로를 청취하기도 하고, 뉴스를 듣고 나서 "엄마, 오늘은 날씨가 몹시 춥대요. 옷 따뜻하게 입고 가세요"하고 전해 주기도 하고 "엄마, 비가 온대요. 꼭 우산을 챙겨 가세요"라고도 했습니다.
이렇게 우리 집에서 TV소리가 멈춘 지 1개월도 더 지난 며칠 전, 남편은 저에게 아이들에게 세계문학전집을 사 주자고 했습니다.
사실 저는 그동안 책을 전집으로 구입하는 것을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읽고 싶은 책은 필요한 때에 그때그때 사 보는 것이 낫다고, 괜히 한꺼번에 많은 책을 구입해서는 단 한 번도 읽지 않는 책이 있는 것은 비경제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저의 이야기에도 남편은 아이들에게 책 읽는 습관을 들여주기 위해서, 그리고 대학교에 진학하기 전까지 꼭 읽으면 좋은 책들을 지금 사 주어서 봄방학부터 책을 읽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 책을 구입하면 30%의 할인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가만히 남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괜찮을 듯하여 저는 인터넷으로 100권의 세계문학전집을 주문하고야 말았습니다.
어제 (2월 18일) 오후, 드디어 주문했던 책이 도착했습니다. 그 많은 책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마땅한 곳을 찾던 남편이 거실장 위의 TV를 들어내고 그 자리에 책들을 겹겹이 쌓아 올렸습니다.
TV는 이제 우리 집에서 영영 애물단지로 전락하고야 만 것입니다. 그냥 밖으로 들어내기엔 아까운 우리 집 TV를 어디로 보내야 할지 고민하던 중, 거실 TV 상태가 신통치 않은 시댁 거실로 옮기기로 했습니다.
2개의 박스에서 꺼낸 책들이 알록달록 쌓여 있는 것을 본 딸아이가 "엄마, 우리 집이 마치 도서관 같아요, 이제 마음껏 책을 봐도 되겠네요"하면서 좋아합니다.
오늘 새벽 2시였습니다. 잠시 잠에서 깨어 거실로 나섰다가, 딸아이의 방문 틈 사이로 가늘게 불빛이 흘러나오기에 '불을 끄지 않고 잠이 들었나…'하는 생각으로 방문을 열어보니, 그때까지 딸아이가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만 자거라"하면서 딸아이 방문을 닫는데, 제 마음은 금세 흐뭇해집니다.
우리 집 거실에는 제가 이름도 모르는 서양란이 노란 꽃망울을 활짝 터트리고 있습니다. 2년 전, 이사를 떠나는 주인에게 외면받아 버려진 그 난을 가져 와 분갈이도 해 주고, 물주기도 게을리하지 않았더니 지난해에 이어 2번째로 꽃을 피운 것입니다.
이처럼 난 한 포기를 가꾸듯, 부모로서 정성을 다해 우리 아이들을 바른길로 이끌어 주고, 보살펴 준다면 아이들이 소중한 꿈을 활짝 꽃피우는 날이 오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