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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다는 핑계로 미뤄 둔 고향 길, 오늘(20일) 3주만에 엄니를 뵈었다.
"할머니, 그 동안 안녕하셨어요?"
"아이고, 내 강생이(강아지)들, 왔나!"
엄니는 버선발로 축담에 내려서는데, 아, 무심하게 끌리는 엄니의 다리. 와락 안겨든 아이들을 부둥켜안고, 엄니는 연신 볼을 비빈다.
엄니는 도시락에 담아온 밀치(참숭어)회를 입 짧은 손자에게 싸 주시며 "한 입 가득 넣고 훌툴 훌툴, 덤썩 덤썩 맛있게 먹어야지! 복은 음식 끝에 나는 법이다. 아나, 민지야. 너도 먹어봐라. 할미가 싸주니, 더 맛있지?"라고 하신다.
아이들도 상추와 들깻잎에 회를 가득 싸서 어머니께 내민다.
"할머니도 어서 드세요!"
"오냐, 너거(너희)가 싸주니 회가 더 꼬시구나(고소하구나)! 며눌아야, 너도 퍼뜩 묵거라!"
아들과 집을 한 바퀴 휘 둘러보는데, 남새밭에서 파릇파릇한 봄동을 보았다.
"그놈, 겉절이를 해 먹으면 참 만나겠다. 아들아, 봄나물이 났는지 뒷들에 나가보자!"
아들은 소쿠리 들고, 나는 호미 들고, 우리는 손잡고 집을 나선다. 마을을 막 돌아나가는데, 구포아지매 텃밭 돌무더기에 돈나물이 보인다.
"먹는 나물이에요?"
"그럼! 돈나물은 볶은 된장을 뜨거운 상태로 부어서 무치거나 국물김치로 담가 먹으면 아삭 아삭 씹히면서 향긋한 맛이 난단다."
야산 언덕배기, 고추 심은 밭을 조심조심 훑으며 지나가는데 아들이 외친다.
"아버지, 여기 푸릇푸릇한 싹이 있는데요!"
햇볕이 빼곡히 고개를 들이민 밭 언덕 사이에서 나는 마침내 봄을 만났다.
"아들아! 그건 쑥이란다. 이 땅의 가난한 백성들의 생명을 이어주는 '생명의 풀'이었단다."
아들과 나는 재미가 나서 재게 손을 놀리며 쑥을 뜯는다. 그런데 밭고랑 사이에 냉이가 많다. 아들과 내가 뿌리 채 캐낸 냉이의 머리에는 하얀 냉이 꽃이 앙증맞게 봄을 피웠다.
"꽃이 피었어요. 겨울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꽃이 핀 것이 너무 신기해요!"
"그래, 어쩌면 그것은 찬 겨울 동안 따스한 햇볕을 조금씩 갈무리해 두었다가 마침내 봄이 되자 그 생명을 겨워낸 것이겠지!"
먼저 나서 겨울의 찬 기운에 색이 바랜 냉이의 이파리는 뜯어내고 뿌리에 있는 흙은 털어내어 손질하고 나서, 아직은 가녀린 쑥을 다듬다가 나는 아들에게 불쑥 묻는다.
"아들아. 이 세상에서 제일 험한 고개가 무엇이냐?"
"보릿고개를 말씀하시는 거죠!"
"그래, 사람들이 양식이 없어 힘들어할 때 언 땅을 뚫고 '쑥'이 쑥 고개를 내밀면 사람들은 생명을 이어갈 희망이 생겼단다."
내 대답에 엄니는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쑥이 나오는 지금 시절은 '사람들의 보릿고개'는 아니란다. 풀이 나지 않고 여물도 떨어진 '소의 보릿고개'라고는 할 수 있단다. 조금 더 있으면 찔레꽃이 피는데, 그때는 보리가 필락 말락 한단다. 정월대보름까지는 그나마 갈무리한 양식이 남아 있는데, 보리가 필 때쯤에는 양식도 다 떨어져서 타작하면 배로 갚기로 하고 '장기 쌀'을 내어먹었단다. 그때가 바로 '사람들의 보릿고개'인데, 그것을 넘기기 위해 겨울 동안 남자들은 칡을 캐고, 쑥이 나면 여자들은 쑥을 캐어서 부지런히 말렸단다."
엄니의 긴 설명에도 아들은 귀를 쫑그리고 듣는다.
"소화가 안 될 때는 쑥물을 마시고, 다친 곳에는 쑥을 찧어서 바르기도 했단다. 단군신화에 보면 쑥은 곰을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만들지 않느냐? 그래서 아버지는 쑥을 '생명의 풀'로 부르고 싶구나!"
아내는 손질한 쑥과 된장을 조금 넣고 들깨가루를 더하여 조물조물 무쳐서는 멸치를 우려낸 국물에 조갯살을 넣어 쑥국을 끓여내고, 살짝 데친 파릇파릇한 냉이무침을 상위에 올렸다. 우리 집 상위에는 금세 오늘 캐낸 봄나물 향으로 그득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