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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2년 전 2월 4일 입춘에 돌아가셨다. 입춘은 양력으로 언제나 2월 4일로 변함이 없기에 이제 내게 있어 입춘은 봄의 서곡이면서 동시에 아버지를 추억하는 날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입춘에만 국한 되지 않고 2월의 많은 날, 아버지가 떠오른다.

특히 올해는 지난 설 엄마가 무삭제판(?) '아버지의 로맨스'를 들려주어, 더더욱 아버지를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울고 웃곤 하였다. 나의 아버지는 줄줄이 4남매를 낳고 난 다음 한국전쟁으로 5년간 군인 생활을 한 다음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한 일 년쯤 살다가 객지로 돈 벌러 가서는 9년만에 돌아왔다. 물론 돌아온 아버지에게 '돈다발'은 없었다(참고로, 아버지가 없는 그 십수 년을 엄마는 별난 시부모 수발에 4남매를 키우며 과부 아닌 과부가 되어 이웃에 왕따 당하며 살았다. 엄마에게 있어 아버지는 '웬수'였다).

돈다발이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차마 체면상 제 발로 걸어들어 올 수 없어 은근히 엄마에게 자신의 거처를 알렸다. 이에 엄마는 할 수 없이 인간 하나 구제해 주는 셈치고 돈다발이 없어도 남편을 받아들였다고 하는 것이 그동안 내가 들은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게 된 배경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이야기는 진실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돈다발'을 손에 쥘 때까지 올 생각이 없었는데 엄마와 친척 아저씨가 여러 수소문 끝에 아버지를 찾으러 가서 데리고 온 것이었다. '한술' 하던 아버지의 그 수많은 취중진담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어느 충청도 여인에 관한 고백이었다.

"내가 객지생활 오래해도 한 눈 팔며 막 살지는 않았다. 딸꾹. 한 번은 충청도가 고향인 과수댁이 자신이랑 살자며 애원하는 것을, 딸꾹, 무슨 소리? 나는 고향에 처자가 있소 하며 거절했다. 딸꾹."

그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아버지 같은 술꾼을 좋아하는 여자가 있었다니 그 여자분 눈이 삐었나 했다. 그리고 아버지를 좋아했으면 악착같이 좋아해서 고향에 못 돌아오게 할 것이지 왜 어설프게 잡았다가 놓았나 원망했다. 객지에서 돌아온 아버지와 함께 산 엄마의 중년과 노년의 삶이 너무도 신산스러웠기에 그리 생각했었다.

엥?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엄마와 친척아저씨가 아버지를 찾아가서 애원해서 데려온 것이었다.

"니 아버지가 강원도 '진부'에서 산판일 한다케서 어렵게 기차 삯을 마련하여 찾아갔다. 멀기는 얼마나 먼지. 기차도 타고 버스도 타고. 진부에 도착해서 진부면 지서(파출소)에 가서 물으니 니 아버지 사는 곳을 아는 사람 집을 가르쳐 주데."

아버지를 안다는 집에 가서 엄마와 친척아저씨는 저녁이 되어 그 집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고 한다. 이윽고 저녁이 되자 그 집 주인은 돌아왔고 아버지의 거처를 안다며 아버지를 데리러 갔고 지서에서 상봉하기로 하였다고. 해서 다시 지서로 가서 아버지를 기다리는 동안 엄마와 친척아저씨는 지서 경찰로부터 아버지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정씨 요새 사는 재미를 느낄 겁니다. 집 떠나온 지 그만큼 되었으면 고향에서도 잊었을 것이니 대충 아무하고나 결혼해서 정착하라고 수년 전부터 모두들 충고했지요. 그래도 정씨는 고향에 처자가 있다며, 돌아간다며 늘 혼자 살다가 불과 몇 달 전에 딸 하나 놓고 소박 당한 충청도가 고향인 아낙 만나서 살림을 차렸는데 지금 아마 깨소금일깁니다."

난감한 얘기를 듣고 엄마와 친척아저씨가 망연자실한 가운데 아버지가 지서 문을 열고 들어섰다. 친척아저씨는 좋은 언변으로 아버지를 설득했다고 하였다. 그래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게 순리가 아니겠냐고. 아버지는 혼란스러운 가운데 고향으로 돌아오기로 결정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집에 가서 이제 막 신혼 아닌 신혼살림에 접어든 새 아내에게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통고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그 새댁은 가지 말라며 가고 나면 나는 어찌 사나 하며 아버지를 부여잡고 통곡을 하였다고. 그래도 아버지는 친척아저씨와 엄마가 불원천리 먼 길을 달려 온데다 담보로 자식까지 4명이나 있으니 막 시작한 '사랑'보다 '핏줄'에 기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돌아온 아버지는 한동안 고향생활에 적응을 못하였다. 어느 날은 저녁이 어둡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아 다시 가버렸나 싶어 엄마가 불안한 마음으로 신작로를 따라 찾으러 나서니 아버지는 마음은 진부에 가 있고 몸만 터덜터덜 돌아오고 있었다.

아, 그때 마음 약해지지 말고 내처 쭉 가서 진부에서 제2의 인생을 살았어야 아버지도 편하고 엄마도 편했을 텐데…. 아버지가 마음 한 번 약하게 먹는 바람에 엄마도 고생 아버지도 고생 그 이름모를 충청도 젊은 과수댁도 고생. 허나, 묘한 것은 아버지가 그날 그대로 '내 빼지' 않고 되돌아왔기에 오늘의 내가 있게 되었다는 사실. 삶의 아이러니. 나는 이런 딜레마 속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살아 생전 술잔을 손에 들고 당신이 직접 감동 없이 되풀이해서 충청도 출신 아낙을 언급할 때는 지겹기만 할 뿐 그 속에 어떤 '회한' 같은 것이 들어 있다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아버지는 지금의 내 나이쯤에 나름의 로맨스에 작별을 고하고 조강지처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내 아버지의 인생에 술은 있었을지언정 로맨스는 없었다고 단언했는데 사실은 로맨스도 있었네. 어쩌면 그 로맨스가 이루어지지 못했기에 오래도록 아버지 마음 한 자락에 자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아버지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면 너무도 쉽게 이해가 된다. 올해 팔순인 엄마에게는 미안하지만, 아버지가 떠난 후 그 충청도 아낙은 어찌 그 별리의 세월을 살아냈을까. 그리고 지금은 어느 하늘 아래서 생의 마지막 불꽃을 사르고 살까나.

엄마에게 아버지 로맨스의 무삭제판을 들은 후, 새삼 '진부'라는 지방이 내 맘에 들어왔다. 그전에는 강원도 하면 횡계나 평창 그리고 메밀꽃의 봉평장이 생각나면서 진부는 진부하게 그 후순위로 어쩌다 떠오르는 지명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역전. 강원도 하면 진부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처자를 떠나 아버지 삼십대의 많은 날을 보낸 진부. 그 진부를 언젠가는 꼭 한 번 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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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이라는 말이 좋습니다. 이 순간 그 순간 어느 순간 혹은 매 순간 순간들.... 문득 떠올릴 때마다 그리움이 묻어나는, 그런 순간을 살고 싶습니다. # 저서 <당신이라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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