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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의 매력은 과거와 현재, 디지털과 아날로그 문화를 관통하는 '퓨전의 힘'에 있다.
<궁>의 매력은 과거와 현재, 디지털과 아날로그 문화를 관통하는 '퓨전의 힘'에 있다. ⓒ iMBC
<궁>의 세계에 입문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아니, 21세기에 뜬금없이 웬 황실 타령?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가 된 지가 언젠데 무슨 입헌군주제니, 황태자라니. 에이, '뻥'을 쳐도 정도껏 치셔야지.

배경은 분명히 현대인데, 인물들은 옛날 사극에서나 보던 전통 궁중 의상을 입고 너무나도 태연스럽게 옛날 사극 톤의 대사를 읊어댄다. 그렇다고 온전히 '사극 필'에 충실한 이야긴가 싶으면 어김없이 '좌우당간' '열공하삼' 같은 생뚱맞은 통신 용어가 튀어나온다. 이쯤 되어 '이 무슨 당황스럽고 시대착오적인 시추에이션?'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이 '유치한 아동 드라마'를 처음부터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정신 건강에 이로울 것이다.

과거와 현재,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공존하는 기묘한 가상의 세계. <궁>의 세계는, 잊혀진 역사를 상상력의 힘으로 복원해낸 가공의 무대다. 현대인들에게, 공간적으로는 가깝지만 정서적으로는 멀게만 느껴지던 '궁'. 흘러간 시대의 박제된 유물로 기억되던 공간을 화려하고 생동감 넘치는 판타지 로망의 무대로 부활시킨 기발한 상상력만으로도 <궁>의 설정은 충분히 흥미롭다.

'알았지? 이건 그냥 상상일 뿐이야.' 오프닝에서부터 천연덕스럽게 강조하는 채경(윤은혜)의 내레이션은 <궁>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당신이 <궁>의 세계에 빠져들고 싶다면 이야기가 제시하는 달콤한 거짓말에 좀더 너그러워질 필요가 있다.

원작 만화의 힘, 거부할 수 없는 퓨전의 매력

<궁>의 인물들은 동시대의 현실적인 고민들이 거세된 대신, 유사 어른의 모습으로 솔직한 욕망의 판타지를 대변한다.
<궁>의 인물들은 동시대의 현실적인 고민들이 거세된 대신, 유사 어른의 모습으로 솔직한 욕망의 판타지를 대변한다. ⓒ iMBC
<궁>의 매력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키워드는 '퓨전'이다. 처음부터 이 작품의 장르나 색깔을 하나로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21세기를 배경으로 한 황실스토리라는 점에서는 퓨전시대극, 엽기 발랄한 여주인공의 좌충우돌 모험담에선 학원코믹물, 왕위계승을 둘러싼 갈등구도에서는 음모와 암투의 궁중사극, 주인공 네 사람의 엇갈린 사각관계와 신데렐라 스토리에서는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의 느낌을 풍기기 때문.

<궁>의 원작이 자유로운 상상력을 모태로 하는 만화였다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얼핏 보면 그저 유치찬란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속에는 현실에서 이루지 못할 욕망을 자유분방한 상상의 힘을 통해서나마 대리만족하고자 하는 인간의 표현 욕구가 숨어있다. 이 황당한 가상의 세계 속에서는 처음부터 '좌우당간' 불가능한 일이란 없다.

주인공 채경은 황실과의 정략결혼을 통해 일약 신분상승의 판타지를 이루는 전형적인 신데렐라다. 원치 않는 정략결혼에 희생당하는 것처럼 보이고 귀여움과 천진무구함으로 미화되어 있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황태자비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얻은 부와 명예를 만끽하려는 현실적인 면모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황태자 신(주지훈)은 요즘 트렌디드라마에서 흔히 나오는 '싸가지 없는 왕자'의 전형이다. 그러나 용서가 되는 것은 그가 말 그대로 '진짜 왕자'이기 때문이다. 극중 대사에서도 나오듯 재벌 2세나 상류계층이 '진골'이라면, 신은 '성골'이다. 이신은 진골조차도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감히 넘볼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성골로서 왕자병이나 이유 없는 반항조차 일종의 특권처럼 자연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존재다.

지나치게 '만화적인' 느낌을 주는 장면은 사라지기도

<궁>의 등장인물들은 분명 청춘의 감수성을 간직하고 있는 10대 선남선녀들이지만, 이들에게서 동시대의 현실적인 고뇌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황태자와 황태자비라는 예정된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신과 채경, 역시 상류층인 율(김정훈)과 효린(송지효)에게 그 시기 청춘들이 의례 겪을 법한 소소하고 일상적인 성장통이나 진로에 대한 고민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어른의 얼굴과 생각을 품은 채 왕위계승을 둘러싼 음모와 암투, 엇갈린 애증으로 둘러싸인 사각관계에 더 집중한다. 성인과 미성년, 친구와 연인의 경계선에 서 있는 10대 커플 신과 채경의 밀고 당기는 연애담이 십대들의 결혼에 관한 성적 판타지를 부채질한다면, 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빼앗아서라도 되찾아오겠다는 야심에 불타는 율과 효린은 젊은 세대의 현실적인 욕망을 드러내는 인물들이다.

이처럼 <궁>의 근간은 원작 만화가 지니고 있던 장점들에 십분 기대고 있다. 다만 부분적인 각색은 있다. 원작에서 존재하던 코믹한 감초 공내시가 드라마에선 근엄한 공내관으로 바뀌고,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던 채경의 할아버지가 드라마에선 등장하지 않는다. 또 일부 주·조연급 캐릭터의 역할이나 비중이 변경되었고 주인공인 신과 채경의 수학여행이나 학교 축제, 합방 장면 등 과장된 신경전이나 소동극으로 지나치게 '만화적인' 느낌을 주는 장면들은 사라지기도 했다. 그러나 대체로 구성과 캐릭터, 에피소드를 통틀어 원작의 흐름과 분위기를 충실하게 재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국의 전통미에 대한 현대적 재발견

<궁>은 뛰어난 영상미를 앞세워 '한국의 전통 궁중문화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이 돋보인다.
<궁>은 뛰어난 영상미를 앞세워 '한국의 전통 궁중문화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이 돋보인다. ⓒ iMBC
이 파란만장한(?) 모든 사연을 담아내는 공간으로서 <궁>은 등장인물들이 현실에서 이루지 못할 모든 욕망과 판타지를 가능하게 만드는 무대이자, 그 자체로 독립된 하나의 주연 같은 역할을 담당한다.

방영초기 <궁>이 신인 배우들의 캐스팅을 놓고 한창 논란에 휩싸였을 때도, 드라마의 잠재력을 입증해준 것은 바로 <궁>이 보여준 탁월한 영상미에 관한 만장일치에 가까운 지지였다. 대체로 원작의 장단점을 벗어나지 않는 구성에 비해 드라마가 유일하게 원작보다 앞섰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활자 매체가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영상 미학의 성취에 있다.

스타가 없는 대신, '화면빨'을 세우는데 올인 했다는 농담이 있었을 정도로, <궁>은 정교한 세트와 미술의 공간미, 눈부시게 아름다운 전통 의상과 HD화면의 현란한 색채감각을 보여준다. 섬세한 고증과 현대적인 감각으로 궁중 문화를 재현해내는 수려한 영상미는 자칫 가볍게 보일 수 있는 드라마의 '품위'를 되살려놓았다.

<대장금>이 스토리 못지않게 조선시대의 궁중요리와 의술 등 한국의 전통문화를 복원하는 뛰어난 영상으로 화제가 됐듯, <궁> 또한 황인뢰 프로듀서와 미술팀이 구축한 영상미학의 형식적 진보, '한국의 전통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낸 미적 성취'만큼은 높이 평가받을 만 하다.

독특한 형식적 실험으로 기억될 드라마 <궁>

제작 초기 끊임없이 제작진과 배우들을 괴롭혔던 안티팬들의 공세도 결과적으로는 전화위복이 되었다. 특히 윤은혜의 캐스팅을 두고 연기력이 검증 안 된 '생짜' 신인임은 둘째 치고, 불면 날아가 것 같은 만화 속 채경 역할에 '소녀 장사가 웬 말이냐'며 거부감을 나타내는 팬들이 적지 않았다. 지금까지 성공한 선례가 거의 없는 가수출신 배우라는 것도 반대론을 확신시킨 원인이었다.

그러나 비판은 곧 관심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말을 입증하듯, '윤은혜식 채경'의 캐릭터가 차츰 드라마에서 자리 잡아가고 원작의 재구성에 대한 호기심과 드라마의 영상미에 녹아든 팬들이 점차 고개를 돌리기 시작하면서, <궁>은 안티팬들을 드라마의 열렬한 지지자로 되돌리는 데 성공했다. 상대역인 황태자 신 역의 주지훈도 특유의 시니컬한 매력을 내뿜으며 새로운 스타로 급부상했다.

중반을 훌쩍 넘어서 이제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는 <궁>이 최종적으로 시청자에게 어떤 작품으로 기억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기발하고 재치 있는 상상력'과 '황당하고 유치한 거짓말'로 여전히 극명하게 엇갈리는 드라마에 대한 평가, 배우들의 연기력에 대한 논란은 아마 이 작품이 막을 내릴 때까지 따라다닐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같이 엇갈리는 시선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궁>은 국내 드라마에서 이제껏 시도하지 않았던 독특한 형식적 실험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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