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인구 5만이 채 안 되는 이곳 미국 버지니아주 해리슨버그에는 알뜰시장이 여러 개 있다. 알뜰시장은 사람들로부터 물건을 기탁 받아 깨끗이 손질해서 내다 파는 중고 가게다. 이곳에 전시된 옷에서는 세탁기에서 바로 나온 듯한 세제 냄새가 나기도 한다. 비록 중고품이지만 남대문 시장에 켜켜로 쌓인 채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몽땅떨이' 새 상품보다 깨끗해 보인다.
동네 알뜰시장인 'Tried & True'에서 물건을 샀던 할머니는 왜 잔돈을 받지 않았을까. 한 푼이라도 절약하기 위해 알뜰시장을 찾았을 텐데 말이다. 그 해답은 바로 가게 출입문 옆에 붙은 포스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곳에서 판매되는 수익금 중 일부는 '세계 식량 위기 기금(Global Food Crisis Fund)'과 에이즈로 고생하는 아프리카에 보낸다고 한다.
세계 식량 위기 기금의 2005-2006 프로그램은 세계 20개 개발도상국에 희망의 씨를 뿌리는 것이다. 이들 나라들은 극심한 영양실조와 유아 사망, 버려진 고아들의 열악한 삶과 싸우고 있는 최빈곤 국가들이다. 앙골라와 엘살바도르, 에쿠아도르, 수단과 과테말라 등이 열거되어 있는데 팸플릿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나라는 안타깝게도 우리와 한겨레인 '북한'이다.
여느 알뜰시장과 조금 다르게 운영되는 'Tried & True'를 취재하고 싶다고 하니 가게 안에서 물건을 정리하던 여자가 자신을 매니저라고 소개하며 나선다. 상큼한 미소를 지닌 '데브 레이먼'은 가게 구석구석으로 나를 데리고 다니며 자세히 설명을 한다.
- 이곳에서 파는 물건은 모두 값이 저렴한데 언제 돈을 모아서 저런 큰 프로그램에 후원을 하나요?
"우리 가게는 작년에 문을 열었는데 비영리 알뜰시장(non-profit thrift shop)이어서 모든 물건을 기증 받았어요. 많은 분들이 좋은 물건을 많이 기부해 주었고, 또 많은 분들이 고맙게도 이곳을 찾아 주었어요. 그래서 작년 첫 해, 판매 수익금 가운데 5000달러를 이곳 교회에 기부했어요. 그 기부금은 기아와 에이즈로 고생하는 이들을 위해 쓰이게 돼요. 저기 신문이 보이죠? 바로 우리 가게가 소개된 신문이에요."
- 그럼, 가게 운영은 누가 하는 건가요? 모두 보수를 받지 않는 자원봉사자들인가요?
"아니오, 저와 제 남편은 매니저로 일하면서 보수를 받아요. 하지만 다른 분들은 모두 자원봉사자들이에요. 저기 보이는 아이린은 매주 목요일에 이곳에 나와요. 요일 별로 다른 분들이 나와서 우리를 도와주고 있어요."
올해 67세인 '목요일 담당' 캐셔 아이린은 자상하고 기품이 있는 할머니다. 차분하고 느린 목소리로 자신의 봉사 활동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한다.
"저는 매주 목요일 오전 10시에서 1시까지 이곳에서 일해요. 처음 이 가게가 문을 열었을 때부터 일을 해 왔어요. 사실 저의 봉사 활동은 별 게 없어요. 제 한 몸 나서서 불쌍한 이들을 도울 수 있다고 하니 하는 일이지요. 주위를 둘러보면 딱한 아이들이 많잖아요. 이렇게라도 그들을 도울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아이린의 머릿속에 기아와 에이즈로 고통 받는 이들의 모습이 그려지는 듯 금세 눈가에 눈물이 핑 돌고 이내 눈시울이 발개진다. 아이린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 가게 문을 들어서는 멋쟁이 할머니가 있었다.
"함께 일하는 주디예요. 오늘은 뭘 사려고 온 것 같아요. 주디는 매주 화요일에 이곳에서 일해요. 주디는 손 재주가 뛰어나서 여기서 파는 카드는 모두 주디 손을 거쳐요. 주디, 이리 좀 와 봐요. 이 분은 한국에서 온…."
"이 카드는 모두 제가 만들었어요. 카드에 깃털을 붙이거나 꽃이나 캔디로 장식을 해요. 예쁘죠? 하하하."
실례인 줄 알면서 주디에게 나이를 물으니 "45세"라고 천연덕스럽게 대답을 한다. 내면의 나이가 그렇게 젊다는 뜻이리라. 앞으로 내 노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이들을 통해 새롭게 자각하게 된다. 주디는 소녀처럼 한참을 깔깔거리고 난 뒤에야 "75세"라고 정정을 해준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당당하다.
미국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런 자원 재활용의 '알뜰시장'이다. 사실 알뜰시장은 이곳뿐 아니라 미국 어느 도시엘 가더라도 없는 곳이 없다. 그만큼 자원이 알뜰하게 재활용되고 있다.
재활용되는 품목도 백화점에 진열된 물건처럼 다양해서 없는 것이 없다. 옷가지와 책, 장난감, 주방기구, 신발, 가방, 액세서리, 가전제품, 가구 등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은 다 있다.
길을 가다 우연히 들르게 된 이 알뜰시장에서 나는 꽤 실속 있는 쇼핑을 했다. 무엇을 샀느냐고? 생각보다 값이 비싸서 그동안 사기를 주저하고 있었던 다리미판을 하나 샀다. 3달러 50센트에. 깨끗하고 튼튼한데다 다리미까지 놓을 수 있어서 내 마음에 쏙 드는 물건이었다.
그리고 바비큐를 할 때 필요한 큰 포크도 샀는데 50센트를 줬다. 또, 신간 잡지인 2월호 '리더스 다이제스트'와 분리형 도시락도 각각 25센트를 줬다. 이곳에 진열된 잡지는 묵은 잡지뿐 아니라 최신호 잡지까지 모두 25센트다.
어떻게 최신호 잡지가 이곳까지 오는지 궁금해서 매니저에게 물으니 정기구독을 한 사람이 잡지를 다 읽은 다음에 이곳 알뜰시장에 기부를 한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잡지 표지에 정기구독자의 이름과 주소를 지워버린 흔적이 눈에 띈다.
분리형 도시락 역시 그동안 쇼핑몰에 여러 번 갔지만 살 수 없었던 물건이었다. 그런데 새 것 같은 도시락을 겨우 25센트에 살 수 있어서 기분이 아주 좋았다. 이날 내가 쓴 돈은 물건값 4달러 50센트에 세금 23센트를 합쳐 모두 4달러 73센트였다. 완벽한 쇼핑이었다.
물건도 싸게 사고 불우한 이웃도 도울 수 있는 일석이조의 알뜰시장! 우리나라에는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나라도 있다고 듣긴 했다. 하지만 아직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걸 보면 그만큼 활성화되어 있지 않다는 얘기일 것이다.
아참, 남이 쓰다 만 중고품이라서 '찜찜한' 생각이 든다고? 한 번 와 보시라. 물론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꽤 많은 알뜰시장들이 깨끗하게 손질된 물건을 판매하고 있다. 그리고 알뜰시장의 실내 인테리어 역시 새 가게 못지않게 잘 꾸며 놓았다. 결코 칙칙한 곳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알뜰시장도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찾는 곳이 되도록 '매력적으로' 운영한다면 이곳 알뜰시장처럼 활성화되고 사랑받는 장소가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