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넓은 농장에 씨를 뿌려 가을이 풍년이 돌아오면
누렇게 누렇게 변해서 우거져 우거져 파도치리.
에헤- 뿌려라 씨를 활활 뿌려라.
땅의 젖을 짜먹고 와싹와싹 자란다."
위 노래는 고려인들이 즐겨 부르는 창작민요 <씨를 활활 뿌려라>이다. 이 노래만 보면 고려인들이 남의 나라에서 고통받으며 살았다는 것보다는 정말 활기차게 살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씨를 활활 뿌려라'라든지, '땅의 젖을 짜먹고', '와싹와싹 자란다'라는 말들은 정말 정감있고, 활동적인 느낌이 든다. 이 노래를 한양대학교 김보희 교수의 생음악으로 들은 뒤 나는 작은 흥분에 휩싸인다.
'고려인'은 누구인가? 고려인은 러시아말로는 '까레이스키'라고 하며, 고려족 또는 고려사람이라고도 하는데 러시아를 비롯한 독립국가연합에 거주하는 한인교포를 아울러 일컫는 말이다. 이들이 사는 곳을 보면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몰도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즈스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야 등이다.
한국인들이 러시아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863년(철종 14)으로, 농민 13세대가 한겨울 밤에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서 우수리강 유역으로 갔다고 한다. 이어 점차 늘어나 1869년에는 4500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이주하였다. 이후로도 이민은 계속되었는데, 대부분이 농업 이민이었으나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망명도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대숙청 당시 연해주 지방의 한인들은 소수민족의 분리, 차별정책에 휘말려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했다. 이들은 화물열차에 짐짝처럼 실려 중앙아시아의 황무지에 내팽개쳐졌는데, 무려 17만50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강인한 생명력으로 중앙아시아의 허허벌판을 개척하고 집단농장을 경영하는 등 소련 내 소수민족 가운데서도 가장 잘사는 민족으로 뿌리를 내렸다.
그러다 1992년 소련이 무너지고 러시아와 11개 독립국가로 나뉘면서 고려인들이 사는 나라에서는 배타적인 민족주의 운동이 확산되었다. 이로 인해 고려인들은 일터에서 쫓겨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1996년 현재 독립국가연합 내 고려인 수는 46만 명이라고 한다.
이 고려인들은 조선을 기억하고 있을까? 고려인 2~3세대들은 한국말을 할 줄 모르는 상태이다. 하지만, 이들은 아직까지 우리의 민요를 기억하고 부르고 있다고 한다. 물론 민요는 새롭게 창작한 노래들과 함께 그들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한양대학교 작곡과 김보희 교수는 전한다.
3년여 강의도 포기하고, 역시 대학교수인 남편의 외조를 받아가며, 오로지 고려인들의 노래에 매달려 해마다 2번씩 7번의 고려인 현지조사를 마치고, 이번에 <소비에트 시대 고려인 소인예술단의 음악활동>이란 박사학위 논문을 내기에 이르렀다. 또 박사논문 쓰기 이전 정추 선생의 자료를 정리하여 3권의 <소비에트 시대 고려인의 노래>를 한양대학교 출판부에서 펴내기도 했다. 어쩌면 아무도 해내지 못했던 것을 그의 집념이 이루어낸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이다.
이 박사학위 논문에는 '고려인 소인예술단의 역사', '꼴호즈(집단농장) 소인예술단의 음악활동', '소인예술단의 노래 레퍼터리 연구', '<레닌기치>에 실린 창작가요의 음악적 분석' 등이 실려 있고, 고려인들이 많이 부르는 58곡의 악보가 수록되어 있으며, 각종 참고문헌도 같이 들어 있다.
그는 이 연구를 통해서 고려인들의 소인예술단이 갖는 의의를 다음과 같이 짚어냈다.
첫째, 이들의 음악활동은 수평적으로는 한국 민요의 지평을 소련으로 확대했고, 수직적으로는 한국 민요를 고려인과 소련 사회의 맥락에 맞게 전승하여 한국 민족음악의 전통을 새로운 차원으로 계승했다.
둘째, 고려인의 노래는 한국적인 것과 러시아적인 것을 중심으로 서양과 일본음악이 섞인 양상을 보이며, 이주의 아픔이 드러나는 이별의 노래가 많다.
셋째,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입각한 한국민요 창작의 지평을 새롭게 열었다.
넷째, 고려인 작곡가들은 고려인의 정서를 잘 표현하기 위해 자신들의 음악에서 전래민요와 잡가, 판소리 음악을 폭넓게 활용했다.
그리고 그는 이 연구의 성과로 소인예술단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였고, 문화적 매개체로서 고려인 소인예술단이 차지했던 사회문화적 기능과 구실을 연구했으며, 소인예술단은 고려인 민족문화의 전수자로서 중요한 구실을 하였음을 확인하는 것을 꼽았다.
또 고려인 노래 묶음책의 연주목록을 분석하여 장르적 특성을 밝혀내고, 음악의 시대적 변천을 고찰하고, 고려인 창작가요의 작곡가와 그들의 작품을 음악적으로 연구, 분석하여 고려인 창작가요에 나타난 한민족의 음악적 전승과 변천에 나타난 음악의 정체성 연구를 했음을 말한다.
먼 남의 나라 땅에서 외롭고 힘들게 살아가는 고려인들이 노래로 그들의 정체성을 지켜가고 있음을 밝혀낸 연구는 우리 모두 크게 손뼉을 쳐서 기려야만 한다. 그리고 그가 연구를 통해 고려인들의 손을 잡은 채 그들에게 민족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해주기를 빌어본다.
- 어떻게 서양음악 작곡가가 고려인 노래를 연구하게 되었나?
"누구나 궁금해 하는 것이다. 서양음악을 전공한 나는 어렸을 때 한글학자였던 아버지(김선기 선생)를 따라 학글학회에 가곤 했는데 그것이 뿌리일 것이다. 미국에서 공부를 한 뒤 1998년에 귀국했는데 한국 사람이 서양음악을 아무리 잘한다 해도 서양인만큼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정서는 서양음악으로 표현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국악작곡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우리 것에 대한 공부도 다시 하게 되었고, 음악과 언어와의 연관성에 눈길이 가 음악인류학을 공부했는데 가까운 곳부터 시작하기로 하여 고려인들부터 하게 된 것이다."
- 고려인들이 부르는 노래에 대해 이야기를 해달라
"고려인들은 북한의 소조활동과 비슷한 '소인예술단'이란 것이 있었다. '소인예술단'이란 광범한 고려인 대중들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조직되어 활동했던 비직업적 예술집단이다. 그들은 고려인 음악예술 활동에 중심적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반 인민들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사회주의 이념과 정부 정책을 홍보하는 역할을 통하여 각 생산 집단들의 생산력 향상을 도모하였다.
그들은 자기 언어로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자기의 정체성을 드러냈다고 보아야 한다. 고려인들은 아리랑, 도라지, 늴리리야 등의 민요를 주로 부른다. 또 창작가요가 많이 발전되었다. 신문에 발표된 것만 140여 곡이 있을 정도이다. 고려인들의 노래를 분석해보면 민요 30%, 창가 40%, 창작가요 30% 정도로 볼 수 있다."
- 국악을 작곡하고, 고려인 노래를 연구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요즘 창작국악이 많이 나온다. 하지만, 우리의 리듬과 박자가 없이 서양 냄새만 난다면 이는 국악이 아니다. 국악을 전위예술로 만들면 안 된다. 선율의 아름다움에만 매몰되지 말고,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 서양음악에 배타적이지 않는 자세로 서양음악을 접목하여 국악이 한층 발전하도록 해야 한다.
- 앞으로 해야 할 다른 계획이 있다면.
"언젠가 새까만 우물이 막혀있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그 우물을 막대기로 뚫으니 뻥 뚫리고 하얀 물이 솟았다. 그리고 그 꿈을 꾼 다음날 나는 또 다른 꿈속에 한글학자인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는 향가를 연구하셨는데 내게 선몽을 해주시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향가 25곡을 작곡하기도 했지만, 이는 옛 향가의 복원은 아니다.
그래서 향가를 단순한 작곡이 아닌 복원해볼 계획이 있다. 향가는 노래인데 아버지의 연구는 어학적 관점에서 머물렀다는 생각으로 음악으로 향가를 풀어낸다는 것이다. 물론 자료도 없고,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기원하며 공부하고 그렇게 해나가겠다.
또 내가 고려인들의 노래를 연구해서 논문을 썼지만 어디까지나 노래이기 때문에 노래로써 알릴 필요가 있다. 그래서 고려인 가수들을 데려다 녹음을 해서 음반도 내고 공연도 할 수 있도록 하겠다. 만일 그것이 어렵다면 현지에 기술진들과 같이 가서 녹음하는 것도 고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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