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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관대첩비를 함경도 길주로 보냅니다." 향이 오르는 가운데 정문부 장군의 후손이 대첩비를 북한으로 보냄을 고하는 고유문을 읽고 있다.
"북관대첩비를 함경도 길주로 보냅니다." 향이 오르는 가운데 정문부 장군의 후손이 대첩비를 북한으로 보냄을 고하는 고유문을 읽고 있다. ⓒ 곽교신

사당 밖에 엎드려 고유문을 듣고 있는 문중 원로들. 이들은 북관대첩비의 복제품을 정 장군의 묘소에 세워줄 것을 문화재청에 요청하고 있으나 실현 여부는 아직 불투명하다.
사당 밖에 엎드려 고유문을 듣고 있는 문중 원로들. 이들은 북관대첩비의 복제품을 정 장군의 묘소에 세워줄 것을 문화재청에 요청하고 있으나 실현 여부는 아직 불투명하다. ⓒ 곽교신
제향의식은 시종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유홍준 문화재청장 등 관계자와 해주 정씨 송산 종중의 후손들이 참가한 가운데 충덕사 전통 제례에 따라 한 시간가량 거행되었다.

제향 의식 후 장군의 묘소 참배를 마친 유 청장은 소감을 묻는 기자들에게 "남북 공동 노력으로 결실을 본 북관대첩비의 환수와 원래 서 있던 자리인 함경도 길주로 보내는 일이 물꼬가 되어 남북의 문화 교류가 활발해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고유제를 지낸 북관대첩비는 서울로 돌아와 남쪽에서 마지막 밤을 보낸 후 삼일절인 3월 1일 오전 7시 서울에서 출발해 같은 날 오전 10시에 개성 성균관 명륜당 앞에서 남측의 문화재청장과 북측의 문화재보전국장(우리의 문화재청장에 해당)등 남북 관계자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북관대첩비 인도인수식'을 마친 후 북측에 공식 인도될 예정이다.

북측은 북관대첩비가 원래대로 복원될 길주 부근의 길을 새로 정비하는 등 나름대로 정중한 예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재청은 원래 위치에 비석의 복원이 완료되면 남측관계자도 참관할 수 있도록 북측 문화재보전국과 협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북관대첩비에 분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문부 의병장은 임진왜란 발발 후 함경도에 들어온 가토 기요마사 진영으로 함경도 일부 군민과 관군이 자진해서 들어가 역모를 꾸미는 등 혼란이 계속되자, 스스로 북평사(정6품) 관직을 버리고 평민이 되어 의병을 일으켜서 가토 기요마사의 군사 천 여명을 제거한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그러나 정 장군의 공은 이간 세력에 의해 100년이 넘게 고의로 숨겨졌다.

정 장군 묘소 참배. 치열한 취재경쟁을 벌이는 이 모습은 북관대첩비의 북측 인도에 특별한 현대사적 의미를 두고 싶은 국민의 마음이기도 하다.
정 장군 묘소 참배. 치열한 취재경쟁을 벌이는 이 모습은 북관대첩비의 북측 인도에 특별한 현대사적 의미를 두고 싶은 국민의 마음이기도 하다. ⓒ 곽교신
일제강점기에 함경도 길주에 있는 비석을 발견하고 치욕을 느낀 일제는 비석을 강탈해 일왕에게 바쳤다. 전후 북관대첩비는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되어 조선의 기를 누른다는 뜻으로 무거운 돌에 짓눌려 있었다.

한 재일 유학생이 우연히 발견한 후 1970년대 말부터 민간이 비 반환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여기에 남북 공동의 노력이 더해져 마침내 작년에 환국을 했다.

북관대첩비 환수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김원웅 열린우리당 의원은 고유제 축사에서 "북관비에는 분단이 존재하지 않는다"며 감격을 감추지 않았고, 유홍준 청장도 "북관대첩비가 임란 중에 있었던 많은 전승을 기리는 전승비 중 하나이지만, 분단 시기에 남북이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지금의 우리에게 알렸다는 의미에서 현대사적 의미도 크다고 본다"며 대첩비의 북한 인도에 의미를 부여했다.

한 인사의 축사처럼 북관대첩비는 단순한 전승비가 아니라 "사람이 의롭게 살다가 갔을 때 후대에 그가 어떻게 기려지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비석이기도 하다.

통일이 되면 북관대첩비를 언제나 제향 할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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