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언급한 대로 서울의 공기는 탁하다. 인사동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그러나 그곳에 가면 우리는 탁한 공기를 그곳의 문화로 보상받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문화는 일종의 또다른 숨이다. 우리는 대기로만 숨을 쉬는 것이 아니라 때로 문화로 숨을 쉰다.
밥만 먹고 살 수 없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의 호흡도 공기 알갱이로만 충족되는 것이 아니다. 인사동은 서울에서 손쉽게 다양한 문화를 호흡할 수 있는 거리 중의 하나이다. 나는 그 거리의 숨 갤러리에 들어가 그곳의 설치 예술품을 내 멋대로 호흡하기 시작했다.
종종 예술은 그 난해하고 엄숙한 분위기의 무게로 인하여 그 앞에 서는 사람들을 주눅들게 만든다. 그러나 그와 정반대로 너무 가벼워 어이가 없는 경우도 많다.
“아니, 이게 뭐야. 그냥 천조각을 이어붙여 놓은 거잖아.”
하지만 생각하기 나름이다. 음에도 조화로운 음이 있으니 색깔에도 분명 조화가 있을 것이다. 조화로운 음이 그냥 듣고만 있어도 좋듯이 색의 조화 또한 그냥 보고만 있어도 좋다.
모든 것이 제 용도에 갇혀있다. 빨래장갑도 빨래하는 용도에 갇혀 있다. 여자도 한동안 여자에 갇혀 있었다. 아니 아직도 많은 곳에서 여자는 여자에 갇혀 있다. 여자를 해방시키고 싶거든 일단 빨래장갑을 먼저 해방시켜야 한다. 그 해방을 누가 눈치채랴.
“빨래장갑도 예술이 되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며 키득키득 웃고 지나갈 것이다. 바로 그 순간 빨래장갑이 제 용도를 성공적으로 탈출한다. 여자가 여자를 탈출하는 것도 예술의 힘을 빌면 좀 더 교묘하고 성공적으로 이루어질지 모른다.
대개의 지퍼는 거의 항상 닫혀있다. 그러나 이곳의 지퍼는 거의 항상 열려있는 분위기이다. 열어놓은 틈 사이로 문화의 바이러스를 내보내 세상을 감염시키겠다는 듯. 아니면 지퍼를 반쯤 열어놓은 것에 주목해 볼 일이다. 반쯤 열어놓으면 이곳에서 세상이 엿보이고 저곳에선 이곳이 들여보인다. 엿볼 때 세상이 은밀한 곳까지 모두 보일 때가 있으며, 들여다 볼 때 속이 제대로 보일 때가 있다.
변기 아래서 세상을 올려보다. 다행이 올려다보는 동안 아무도 실례하러 오지 않았다.
세계 최초의 집단형 오손도손 화장실. 실례도 모여서 함께 하면 더욱 정겹다. 내 말이 말도 안된다고 생각이 된다면 영화 <웰컴투 동막골>을 한 번 떠올려 보시라. 나는 그 영화에서 남과 북이 대립을 화해 무드로 바꾼 결정적 계기가 메밀밭에서의 공동 실례 때였다고 생각한다. 근데 아까 내가 아래쪽에서 올려다 보았던 변기가 어떤 거더라?
색즉시공. 색은 즉 공이니라. 정말이지 색의 속은 비어 있었다.
당신은 인형을 고를 수 있다. 인형에게 이름을 붙여도 된다. 보장은 못하지만 당신이 인형을 집어든 순간 그건 인형이 아니라 행운을 집어든 것일 수도 있다. 핸드폰에 매달고 다니면 당신의 모든 대화를 엿듣겠지만 절대로 당신의 비밀을 발설하는 법이 없다. 두 개를 산다면 그들을 자매로 엮어줄 수도 있다. 인형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이 이외에도 무수히 많다. 자, 이런 데도 당신은 이 인형을 그냥 지나치겠는가.
먹는 것만큼 땅에 질기게 귀속된 것이 있을까. <털보네>의 찹쌀 옥수수 호떡을 사먹기 위해 사람들은 아예 포장마차를 둘러쌌다. 문화도 때로 그것을 호흡하고 향유하기 위해 둘러싸서 지켜야 할 때가 있다.
덧붙이는 글 | 마지막 두 장의 사진은 인사동 거리에서, 나머지는 모두 숨 갤러리에서 찍었다. 개인 블로그에 동시에 게재했다. 블로그-->김동원의 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