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롤린 필립스의 <커피우유와 소보로빵>은 민감한 주제를 다뤘다. 이주노동자 문제를 인종차별의 범주에서 다룬 것이다. 샘은 독일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사람들은 샘을 독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샘의 부모가 아프리카 출신이며 그에 따라 샘의 피부가 까맣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샘은 불이 붙은 이불을 본능적으로 집 밖으로 던진다. 그러자 구경꾼들이 화를 낸다. 아이가 있는데 그걸 던지면 어떻게 하느냐고 역성을 내는 것이다. 기막힐 정도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아이러니한 일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이주노동자 문제와 인종차별문제다. 이주노동자는 자국민이 하지 않는 일들, 흔히 3D라고 불리는 직종을 위해 수입해왔다. 그런데 <소보루빵과 커피우유>처럼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책임의 화살을 이주노동자에게 돌리는 것이다. 실업률이 높아지는 이유를 이주노동자 때문이라고 하고, 세금이 높아지는 이유도 이주노동자 때문이라고 하면 자신들은 아무것도 책임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인종차별문제도 일단 몰아붙이는 경향이 있다. 백인은 깨끗한데 흑인은 더러우며, 백인은 순수한데 흑인은 간교하고, 백인은 똑똑한데 흑인은 멍청하다는 식의 어처구니없는 이분법의 잣대를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인종차별이다. 인종차별이 극대화되면 인간의 등수를 나누게 되고 하위 등수의 인간을 인간답게 대하지 않는다. 어린 아이 샘을 향해 보인 소년들의 행동, 더욱이 샘에게 역성 내는 구경꾼의 행동이 그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어른들도 이런 충격적인 일을 당하면 쉽게 일상에 복귀하기 어렵다. 그러니 어린 아이 샘이야 오죽할까? 더욱이 샘은 자신이 왜 이런 취급을 받는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어린 아이다. 또한 구경꾼 중에는 자신을 아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사실까지 겹쳐 꿈을 꿔도 무섭고 눈을 뜨고 있어도 두렵다. 그래서 고작 해보는 일이 얼굴에 엄마의 화장품을 바르는 일이다. 혹여 그렇게 하면 얼굴이 하얗게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분명 이 같은 일은 '비극'적이다. 그러나 <커피우유와 소보로빵>은 비극 속에서도 희망을 찾으려고 한다. 희망의 씨앗은 구경꾼들 사이에 있던, 샘을 커피우유라고 놀리던 보리스다. 보리스는 샘을 '저주'한다. 샘이 자신보다 공부나 운동을 잘 하고, 피아노도 잘 치기 때문이다. 더욱이 보리스의 부모는 아프리카인보다 성적이 뒤진다고 구박하니 보리스는 더욱 열을 낼 수밖에 없다.
보리스는 자신이 샘을 모욕하고 곤경에 처하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반 아이들도 말리지 않는다. 그런데 보리스가 위기에 처한다. 샘이 그런 일을 당하는 동안 구경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보리스는 그것이 무슨 잘못이냐고 항변하지만 선생님은 구경꾼도 또 하나의 가해자임을 알려준다. 그리곤 보리스에게 다친 샘을 도와주라고 하고 샘의 집을 찾아가도록 만든다.
보리스는 더러운 집에 간다는 사실이 못내 불쾌하다. 하지만 선생님의 지시를 거부할 수는 없어서 샘의 집을 찾아가는데 은근히 놀라게 된다. 평소에 보리스를 '소보로빵'이라고 생각하던 샘의 퉁명스러움은 그렇다 치더라도 샘의 엄마는 친절하고, 집은 자신이 사는 곳과 비슷했던 것이다. 야만인이 거주하는 곳이라고 믿고 욕했는데 알고 보니 자신과도 똑같은 사람들이 살던 곳임을 알게 된 것이다. 보리스로서는 믿던 모든 것이 바뀌는 순간이고 그에 따라 <커피우유와 소보로빵>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희망이 본격화되는 것이다.
<커피우유와 소보로빵>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하다. 샘을 알아가는 보리스와 보리스의 아버지처럼 '차이'를 인정했을 때, '차별'이 사라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인종문제와 이주노동자 문제가 암암리에, 아니 당연하다는 듯이 나타나기에 그런 것일까? 아이들의 시선을 빌려 희망을 찾고 있는 <커피우유와 소보로빵>가 반갑다. 커피우유와 소보로빵이 친해지는 광경은 어른아이 구분할 것 없이 누구에게나 환영받을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