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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식탁에 앉아 중학교 3학년인 딸아이와 저녁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딸아이가 문득 이런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엄마. 우리 아파트 라인에 고등학교 다니는 000 딸 있는 집 있잖아요. 그 집 아저씨가요, 어제 제 엉덩이를 슬쩍 쓰다듬으면서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것 있죠."
딸아이의 말에 깜짝 놀란 저는 "그래서 너는 어떻게 했는데?" 하고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긴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서 그러는데… 그 아저씨가 저보고 키가 많이 크다고 하데요. 그리고 그 아저씨 술도 마신 것 같았어요."
"다음에 또 그런 일이 생기면, 그때는 아주 싫어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그러지 마세요!' 하고 말해야 한다. 아니면 '지금 저한테 성추행 하시는 거예요?' 하고 말을 하든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그래도 되는 줄 알고 자꾸 그런단 말이야. 알았어?"
딸아이는 순간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알았어요" 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사실 3년 전, 우리 아파트에서 최고층인 25층으로 이사를 오면서 아이들에게 단단하게 주의를 준 적이 있습니다.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서 기다리다가, 혹시라도 모르는 낯선 아저씨나 남학생들과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는 일이 생기거든 절대로 그 엘리베이터를 타지 말고 다음에 이용하라고 했습니다.
"왜요?" 하고 묻는 아이들에게 어쩌면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지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들어 현직 국회의원 성추행 사건과 하루에도 몇 번씩 어린아이들의 성폭행 피해가 부쩍 발생하는 터라 딸아이의 이야기는 제 정신을 번쩍 들게 하였습니다.
사실 저 또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생활을 시작한 후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겪은, 결코 기억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불쾌했던 크고 작은 성추행 사건들이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식은 땀이 쫙 흐르던 기억
제가 처음으로 겪었던 일은 1982년 1월이었습니다. 그 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합격한 대학교에서 신입생 신체검사를 마치고 전철을 타기 위해 시내버스를 탔을 때였습니다. 오후 시간이라 시내버스 안에 빈 자리는 없었지만 혼잡한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운전사 바로 뒤에서 버스 손잡이를 잡고 서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버스 손잡이를 잡은 제 손등을 감싸는 것이었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지금도 그 모습이 확실하게 떠오를 것 같은 40대 후반의 키 작은 아저씨였습니다. 순간, 제 기분이 묘하게 나쁘게 느껴졌습니다.
버스 안에 많은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비어 있는 손잡이가 몇 군데 있는데도 굳이 제가 잡은 손잡이를, 그것도 손잡이 빈 공간을 잡는 것도 아니고 제 손을 감싸는 그 아저씨의 속셈이 불쾌했습니다.
저는 제가 잡았던 손잡이를 그 아저씨에게 내어 주고 버스 뒷쪽으로 이동했습니다. 그후 그 아저씨의 행동을 찬찬히 관찰해 보니 또 다른 여학생들을 상대로 저에게 했던 것처럼 계속 반복을 하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시내버스에서 내린 저는 전철역으로 가기 위해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제 팔을 툭 치면서 말을 건네 왔습니다. 옆을 돌아다보니 조금 전 시내버스 안에서 이상야릇한 행동을 하던 그 아저씨였습니다. 순간 소름이 끼치면서 저의 등에는 식은 땀이 쫙 흐르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별 이상한 아저씨 다 보겠네' 하는 표정으로 그 아저씨를 위, 아래로 훓어보고는 정신없이 전철역으로 내달렸습니다. 그 이후로는 같은 버스를 이용하다가 기분 나쁜 그 아저씨를 또 만나게 될까봐 다른 노선을 이용해 학교에 다니던 기억이 납니다.
또 지하철을 이용하여 출퇴근 하던 시절에는 어떠했는지요. 경기도 안양에 살고 있던 저는 관악역에서 전철을 타고 종로3가까지 출퇴근을 했습니다. 어느날 아침 일찍 전철에 몸을 싣고 많은 사람들에게 떠밀려서 안쪽까지 들어가다 보니, 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과 무릎을 맞대고 서게 되었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제 스커트 뒤에 있는 지퍼를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무식한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무식하게 대처를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저는 그 순간 망설이지 않고,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어머, 지금 누가 내 스커트 지퍼를 내리는 거지?" 하고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순간,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제 주변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옆자리에 서 있는 남자분에게 "죄송하지만, 자리 좀 바꿔 주실래요?" 하고 부탁을 했습니다. 옆 사람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자리를 바꾸어 주었습니다.
성추행을 당하면서 불쾌하고 찜찜한 상태로 목적지까지 가는 것보다, 그리고 오랫동안 기분 나쁜 기억으로 남겨두기보다는 적극적인 자세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극복하는 것이 훨씬 지혜롭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안타깝고 화 나는 현실
이번 야당 국회의원 성추행 사건에서도 그냥 당하고만 있지 않고 과감하게 떨치고 소리칠 수 있었던 피해자의 용기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
물론 우리 아파트에 살고 있는 000 아빠는 어쩌면 우리 딸아이가 자신의 딸처럼 대견해 보여서 엉덩이를 쓰다듬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다닌다는 자신의 딸아이들도 다른 누군가 술 취한 사람이 엉덩이를 만졌다고 한다면 아무런 의심없이 순수하게 기분좋은 일로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오늘 아침에 저는 두 아이들과 아침 식사를 하면서 다시 한 번 주의를 환기시켜 주었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어른들을 만나면 설사 모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먼저 "안녕하세요?" 하고 깍듯이 인사를 해야 한다고. 하지만 분위기가 이상하게 느껴지는 낯선 사람과 단 둘이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는 경우가 생기거든 그때는 기다렸다가 다음 엘리베이터를 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인적이 없는 좁은 골목길은 될 수 있으면 이용하지 말라고도 했습니다. 비록 조금 더 걸어가야 할지라도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큰길을 이용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래 전 엄마가 시내버스나 전철 속에서 겪었던 기분 나빴던 이야기들을 들려주며 그런 일에 부딪쳤을 때, 가만히 참고 있지 말고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밝힐 줄 알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를 했습니다.
이제 중학교 3학년과 2학년인 우리 아이들이 본격적으로 사회에 나가기 이전부터 사회의 밝은 면을 배우기보다는, 사회의 어두운 면부터 미리 배우고 사회를 불신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고 은근히 화가 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과 관련된 '성폭력'이나 '성추행' 사건은 한 번 경험하면 피해자에게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결코 간단하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이 결코 경험해서도 안되고, 두 번 다시 그 피해자가 발생되지 않게 차단할 수 있는 근본적인 대처방법이 없는 한, 가장 현명하게 그 위기를 대처해 나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수밖에는 뾰족한 방법이 없다는 사실 앞에, 아직 한참이나 자라나는 아이들을 둔 엄마로서 마음이 답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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