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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필버그와 이건희 회장의 만남을 다룬 1995년 3월 27일자 <타임>지.
스필버그와 이건희 회장의 만남을 다룬 1995년 3월 27일자 <타임>지. ⓒ TIME
이회장 일행이 통역을 통해 자신들의 목표를 설명했을 때, 스필버그는 속이 불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저녁으로 먹은 농어 때문이 아니었다. 스필버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대화를 나누는 두 시간 반 정도에 그 '반도체'라는 말이 족히 스무 번은 나왔을 겁니다.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머릿속이 온통 반도체 생각으로 꽉 찬 사람이 영화산업을 제대로 이해나 할 수 있을까?' 또 저녁 한나절을 완전히 시간낭비 한 겁니다."

기억 속에 파묻혀 있던 그 10년의 사건을 떠올려 준 것은 한국 정부였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스크린쿼터 축소를 대하는 정부의 모습은 '반도체 강박'을 지닌 기업가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다면, 1995년과는 달리 영화인 몇 명이 쓴웃음을 지으며 기업가에게 출구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태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번에 칼자루를 쥐고 흔드는 것은 '문화인'이 아니라 '반도체 정신'으로 무장한 정부라는 이름의 기업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의 '수출기념탑 멘탈리티'

1월 말 한국정부는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나서기 위한 '사전작업'으로 네 가지를 미국에 양보했다. 하나는 광우병 논란으로 통관이 금지되었던 쇠고기 수입을 재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올 7월 1일부터 스크린쿼터제를 현재의 146일에서 73일로 줄이겠다는 것이다. 의약수입과 시장가격, 그리고 자동차 수입 및 배기가스 규제문제에 대해서도 미국 측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정부는 이 조처가 이미 오래전부터 문제가 되던 것을 최근에 해결한 것일 뿐, 무역협정과 별개의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와 주미 한국대사관이 미국 언론에 제공한 정보를 보면 이 '기습발표'가 무역협정을 위한 '분위기 조성용'이었음이 드러난다.

워싱턴 주재 한국대사관의 경제 담당관리 안정기는 한국정부의 스크린쿼터 축소 결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무역협정 협상추구와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다. 그 문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협상 시작에 앞서 전반적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화 인터뷰에서 밝혔다. – 도나 보라크, "미국과 한국, 무역협정으로 한 치 더 다가서다" <유피아이(UPI)> 2006. 1. 26

한국 외교통상부의 무능과 철학 부재는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특히 이번 한-미 자유무역협정 논란은 한국 정치권의 무지와 미국 정치권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대표적인 예라 할 만하다.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가기 전 양보부터 하고 보는 전략적 미숙함만이 아니다. 그보다 심각한 것은 한 사회의 기반이 되는 식량주권과 문화주권을 반도체나 자동차와 간단히 맞바꿀 수 있는 '교역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많은 독자가 의아해 할 것이다. 농업에 대한 무관심이야 한국정부의 유구한 전통에 속하지만, 영화에 대해서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가 전략산업'이라며 온갖 혜택과 지원책을 내놓지 않았던가. 그러던 영화산업이 왜 '본경기'도 시작되기 전에 던져지는 '미끼' 신세로 전락했을까? 정부는 한국영화의 점유율이 50%에 달해 '완전한 경쟁력'이 갖추어 졌기에, 스크린 쿼터 축소가 한국영화에 영향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정부는 더 나아가 스크린 축소가 한국영화 '선진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도 밝히고 있다.

'문화침략 저지 및 스크린쿼터 사수를 위한 영화인 대책위원회'는 정부의 스크린쿼터 축소 발표에 1인 시위 및 대규모 장외집회를 열며 반발하고 있다. 사진은 2월 8일 집회 장면.
'문화침략 저지 및 스크린쿼터 사수를 위한 영화인 대책위원회'는 정부의 스크린쿼터 축소 발표에 1인 시위 및 대규모 장외집회를 열며 반발하고 있다. 사진은 2월 8일 집회 장면. ⓒ 오마이뉴스 권우성
정부는 스스로 이 말을 믿는 걸까. 그렇다면, 쿼터 축소에 대비해 지원하겠다는 4천억은 무엇 때문에 필요한가. 경쟁력을 갖춰 스크린쿼터도 필요 없고 앞으로 미국 영화자본이 몰려들어 한국 영화를 한층 발전시킬 것이라고 믿는다면 '정부 지원대책'은 무엇 때문에 필요하냐는 것이다. 물론 그 금액이라고 해봐야 한국 재벌회장이 미국의 한 영화사에 투자하려던 금액의 절반에도 이르지 못하지만 말이다. 뒤에서 말하겠지만, 막연하게 '경쟁력' 운운하는 한국정부와는 달리, 미국정부는 협약으로 늘어나게 될 상품별 점유율까지 계산해 놓은 상태다.

농업과 문화정책을 통상부와 재경부가 결정하는 나라

불행은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그것은 한국정부가 '<쥬라기 공원> 한 편이 현대자동차 150만대'라는 구호로 영화 진흥책을 내놓을 때부터다. 영화를 한 사회의 정체성과 인식을 규정하고 반영하는 삶의 일부가 아니라, '내다 팔' 산업으로만 간주한 것이다. '문화 콘텐츠'니, '콘텐츠 산업'이니 하는 조합어가 이 '반도체적 의식구조'를 잘 드러내 준다.

노무현 대통령이 1970년대에나 어울릴 법한 '국민소득 3만 불' 구호를 되뇌는 것을 보면 '반도체 멘탈리티'보다는 '수출기념탑 멘탈리티'라는 이름이 더 잘 어울릴 듯하다. 박정희 시대에는 무엇을 팔든지 수출액만 일정 수준으로 맞추면 국가의 이름으로 포상을 하곤 했다. 심지어 정부관리가 '기생관광'을 '외화획득'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일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전체 액수'일 뿐, 그것이 어떻게 구성되고 국민에게 어떻게 분배되는지는 정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때부터 수십 년이 지난 지금, 국민 소득은 몇 배로 뛰었고, 수출은 수백 배 늘었지만, 여전히 다수의 국민은 빈곤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그 그림자는 해마다 짙어가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국민소득'은 소수의 부와 다수의 빈곤을 더해서 나눈 액수에 불과하며, '국민소득 3만 불 시대'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윗분'들이 잘 먹고 잘 살게 되면 자동으로 '아랫것들'에게도 먹을 것이 떨어진다는 '떡고물 경제(trickle-down economy)'는 오래전에 설득력을 잃었으며, 무엇보다 한국의 산업화 역사가 이 이론의 허구성을 입증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한-미 자유무역 협정이 '국민소득 3만 불'의 견인차가 될 것이며 (그는 황우석 교수 연구실에서도 '전율'을 느끼며 '국민소득 3만 불'의 가능성을 보았다고 말한 바 있다) '한-미 무역협정'과 '양극화 해소'를 남은 임기 동안 추진할 핵심 정책으로 삼겠다고 밝히고 있다.

최소한 두 가지 이상의 주요산업 붕괴를 가져 올 무역협정이 어떻게 '양극화 해소'에 도움이 되는지도 이해할 수 없지만, 더욱 불행한 것은 수치적 업적에만 집착하는 현 정부에게서 '문화 주권'이나 '문화적 예외'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나 교양도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스크린 쿼터 결정 발표를 재경부에서 했다는 사실은 문화에 대한 현 정부의 인식을 잘 드러내 준다. 그들에게 영화는 한낱 '산업'이나 '상품'(혹은 '수출의 견인차')일 뿐이다.

현 정부가 과거의 군사정부와 닮은 점은 반문화적 시각만이 아니다. 무역협정 및 스크린 축소 결정의 논의 및 발표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민주적 의견수렴 과정도 없었으며, 사회적 합의를 하려는 노력도 존재하지 않았다. 밀실결정 내용을 기습적으로 발표하는, 이전부터 흔히 보아오던 '대국민 통보'만 있었을 뿐이다.

'미국이 세계'인 노무현 정부의 이데올로기

지금 세계는 경제, 정치, 문화적으로 미국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지역별로 연합하고 있다.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동아시아권의 부상이다. 동아시아 역내 교역비율은 전체 교역량의 절반이 넘고, 2004년을 기점으로 중국은 미국을 제치고 한국 제일의 교역국으로 부상했다. 미국과의 교역량은 매년 줄어드는 반면 중국과의 교역은 매년 50%씩 증가하는 추세다. 그럼에도, 한국의 현 정부는 미국화가 곧 '선진화'며, 미국화가 곧 '세계화'라는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다.

미국의 영향력 상실은 미국학자들조차 동의하고 있는 바다. 특히 무난한 거시경제 지표에도 불구하고 약화 일로에 있는 미국 달러는 미국의 경제 약화와 아시아와 유럽의 부상이라는 세계경제의 구조변화를 드러낸다. 세계의 많은 학자가 최근 잦아지고 있는 미국의 군사행동을 전 세계적인 '탈미국화'에 대한 저항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세계여론을 무시한 미국의 독자적 행동은 도리어 각국의 반감과 탈미국화를 가속화하고 있다.

2005년 5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제4차 국제문화전문가회의(CCD) 개막식. 이날 회의에서 유네스코 문화다양성 협약 최종안이 확정됐다.
2005년 5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제4차 국제문화전문가회의(CCD) 개막식. 이날 회의에서 유네스코 문화다양성 협약 최종안이 확정됐다. ⓒ 박영신
세계적으로 경제와 문화를 분리해 자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지키려는 움직임도 활발해지고 있다. 지난해 전 세계의 환호 속에서 이뤄진 '문화다양성 협약'은 이 문화적 필요와 요구가 증폭되어 나타난 상징적 사건이었다. 유럽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캐나다와 뉴질랜드 등 미국 문화권에 속했던 나라들이 문화산업에 정부지원을 강화하고 방송물에 쿼터제를 도입하는 등 자국의 문화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다. 스크린쿼터제 폐지 이후 영화산업이 붕괴한 멕시코도 뒤늦게 쿼터제를 부활시키며 영화산업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해 애쓰는 상황이다.

유럽과 캐나다 그리고 중남미의 여러 나라가 '미국과의 경제협력에도 불구하고' 지켜내겠다고 다짐하고 있는 농업과 문화산업을 한국은 '미국과의 경제협력을 위해' 양보한 셈이다. 왜 그럴까. 하나는 대통령 측근의 시대착오적 미국중심 세계관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현 정부와 대립하면서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쳐 온 보수언론 때문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미국의 이익과 한국의 이익을 구분해서 판단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현 정부의 미국중심적 세계관은 이번 한-미 무역협상의 교섭대표인 김현종 통상교섭 본부장의 발언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워싱턴에서 미국의 당국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미국과 한국의 FTA는 1953년 군사동맹 이후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말하며, 중국과 외교문제를 불러올 수도 있는 민감한 발언까지도 아끼지 않았다. "현재 가장 많은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는 나라는 중국이지만, 가장 중요한 교역국은 단연 미국"이라는 것이다.

김현종 본부장이 지난 2월 9일 <중앙일보>와 가진 인터뷰는 미국 중심적 세계관은 물론, 노무현 행정부의 추상적인 개발논리와 반농업-반문화적 인식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는 한국과 미국언론 모두에게 한-미 무역협정이 "초고속 인프라를 제공해 줄 것"이며, "미국과의 협력이 선진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모호한 수사학을 되풀이했을 뿐, 그 판단을 뒷받침할 만한 어떤 구체적 증거도 제시하지 않았다.

"세계 최고의 경제 시스템을 갖춘 미국과 경쟁하고 이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우면서 우리 경제 구조를 선진화해 나가는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1만 달러를 넘은 지 10년 이상 지났는데도 아직 2만 달러 문턱에 머물고 있다…이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게 개혁과 개방이다. 비행기로 치면 이코노미 클래스의 맨 앞줄에 앉은 우리나라가 비즈니스 클래스로 넘어가기 위해 필요한 인프라를 FTA가 제공해 줄 것이다."

스크린쿼터 축소에 대해서 그는 "1999년 한-미 투자협정(BIT) 협상 때부터 타결을 보지 못해 7년이나 묵혔던 숙제를 푼 것"이라고 답했다. 무역협정으로 타격을 입을 농업에 대한 '대책' 역시 추상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가 외신을 통해 전한 "한국 농민들에게 틈새상품을 찾아야 한다고 계속 설득할 것" 식의 구체성이 없는 '대안'은 <중앙일보> 인터뷰에서도 그대로 반복되었다.

"농림부가 현재 한두 가지 좋은 아이디어를 연구 중이다. 예외 없는 FTA가 없는 만큼 민감품목에 협상력을 집중해 피해를 최대한 줄이도록 노력하겠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농업, 문화, 금융, 서비스 등 경제기반 붕괴 우려

흥미로운 것은, 정부와 보수언론이 장밋빛 미래를 점치는 한-미 무역협상의 영향에 대해 학자들은 물론 가장 큰 수혜자로 전망되는 기업들조차 대단히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삼성증권의 홍기석 팀장은 2월 20일 <한국경제>와의 인터뷰에서 "한국과 미국의 교역상품 관세율이 이미 과거 다자간 무역협상에서 어느 정도 하락한 만큼 당장 교역구조에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한국의 대미수출이 크게 늘지 않을 것이라는 이 견해는 미국의 의회보고서 내용과도 일치한다.

반면에 미국 기업과 정부와 기업들은 한-미 무역협상을 미국상품 수출을 대규모로 늘릴 기회로 보고 있다. 지난달 의회에 제출된 보고서(CRS Report for Congress)에 따르면, 한-미 무역협정은 한국의 미국 농산물 수입을 4년 이내에 200% 이상 증가시킬 것으로 전망된다. 영화, 자동차, 정보통신 기기 등 제조업 분야를 포함한 미국상품의 한국 수입 역시 평균 54% 이상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반면에 같은 보고서는 한국의 대미수출의 증가율이 21%에 머물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나마 미국이 가장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보는 분야는 섬유, 의류 등 한국이 이미 비교우위를 잃어가고 있는 경공업 분야다.

제조업이 존재하지 않는 미국으로서는 어차피 수입할 가전제품에 관세를 예외로 해 주는 게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국의 주력상품인 자동차, 반도체, 전자제품은 어차피 관세율이 3% 미만이다. 한국의 자동차는 이미 미국시장에서 저가 상품이기 때문에 충분한 가격경쟁력을 갖추고 있는 상태다. 따라서 경쟁력을 더 높이는 방법은 중고시장에서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지 않을 만큼 품질경쟁력을 높이는 것이지, 이미 낮은 관세를 없애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이미 미국 자동차시장은 중국의 초저가 자동차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미국의 자동차 업계는 이번 협정이 미국보다 네 배 가까이 높은 한국의 관세 및 특별소비세를 철폐함으로써 미국 자동차 수출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국은 이미 미국산 자동차에 대한 특별소비세 폐지와 배기가스 환경 기준치 적용 유예를 표명했다. 정부는 이미 1998년에 미국산 자동차에 대한 관세율을 80%에서 8%로 낮추기로 한바, 이에 따라 한국 내 미국자동차 점유율은 지난 5년간 700% 이상 꾸준히 증가했다.

반면에 같은 기간 한국산 자동차의 미국 시장점유율은 150% 증가하는 데 그쳤다. 관세철폐로 수입이 늘어나는 것은 자동차만이 아니다. 한국 수입품에 붙는 관세가 미국의 4분의 1이라는 점을 생각해볼 때 관세철폐의 주요 수혜국이 미국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더구나 미국 측은 이후 한-미 무역협상에서 다룰 주요 의제 가운데 하나로 한국 정보통신기술의 표준 문제에도 개입할 것을 시사하고 있다.

한-미 자유무역 협정은 미국으로서는 그다지 잃을 것이 없는 셈이다. 1월 한국과 미국이 한-미 무역협정 시작을 발표했을 때 미국기업과 정치인들이 보인 '환호'가 이 사실을 잘 드러내 준다. 한국이 농업과 문화산업이라는 핵심산업의 붕괴를 각오하고 뛰어드는 반면, 미국은 산업구조에 아무런 영향 없이 농업과 서비스라는 미국 양대 주력산업의 기폭제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은 관세가 수출입에 절대적인 역할을 하는 농축산물과 한국에 비해 절대 우위에 있는 영화, 방송, 금융, 교육 등에 개방을 요구할 수 있게 된다.

설득의 대상은 국민이 아니라 교역상대인 미국

이번 한-미 무역협정이 가져올 경제적 효과를 구체적으로 다룬 의회보고서.
이번 한-미 무역협정이 가져올 경제적 효과를 구체적으로 다룬 의회보고서. ⓒ 강인규
미국의 한-미 무역협정 관련 의회 보고서는 이번 협상이 경제뿐 아니라 아시아에서 정치적, 군사적 우위를 지키는 등 "미국의 전략적 이익을 높여줄 것"이라는 기대를 숨기지 않는다. 이번 한-미 자유무역협정 논의의 배경이 단순히 경제적인 것만이 아니었음을 시사해 주는 대목이다.

"한-미 무역협정의 지지자들은 이 협정이 미국의 전략적 이익을 높여줄 것으로 보고 있다. 일부는 이 무역협정이 미국과 한국의 정치적 관계를 제고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특히 북한에 대한 한국과 미국의 다른 접근이나 한반도 내 주둔 미군의 수와 역할에 대한 이견 등의 문제를 고려할 때 특히 강조할 만한 부분이다. 또 한-미 무역협정은 한반도에서 미국의 이익에 반하는 국가세력, 특히 중국 및 그 밖의 동아시아 국가들의 경제적, 정치적 영향력 확대를 차단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정부는 한-미 무역협정이 피해갈 수 없는 '대세'라고 강변한다. 그러나 협상 대표인 김현종 본부장에 따르면, 애초에 미국은 한-미 무역협정에 큰 관심이 없었으며, 소극적인 미국을 적극적으로 설득해 협상 테이블로 불러낸 것은 오히려 한국정부다(그는 이것만으로도 큰 성과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지금 이 시점에 안전성이 입증되지도 않은 쇠고기 수입을 재개하고 스크린 쿼터를 축소하기로 한 것은 적어도 외부의 압력 때문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쌀이나, 쇠고기나, 영화나 텔레비전이나 모두 무역수지를 개선하는 '상품'에 지나지 않지만 (한국정부의 입장도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지만), 한국의 입장에서는 국민보건, 식량주권, 그리고 정체성의 문제다. 설득의 대상은 국민이 아니라 교역상대국인 미국이 되어야 한다. 국민이 교역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교역이 국민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말이다.

한 번의 어리석음은 이미 저질러졌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 어리석음을 계속 밀고 가는 두 번째 어리석음이라도 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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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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