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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출판 북라인
이미 제목에서 눈치챌 수 있듯이 <소크라테스와 헤르만 헤세의 점심>은 철학과 문학의 만남을 펼쳐 보이고 있다. 그런데 그 만남의 자리는 격식을 차려 코스별로 진행되는 고급 레스토랑의 잘 차려진 저녁 식탁이 아니라, 손으로 막 집어먹어도 무방한 노천 카페의 허름한 점심 탁자이다.

따라서 그 자리는 무겁지 않고 가볍다. 따분하지 않고 유쾌하다. 그렇다고 해서 진지함이 전혀 없는 경박한 자리인 것은 결코 아니다. 잠시 딴전을 피우다가도 다시 주제로 되돌아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게 되고, 주위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마음껏 웃다가도 어느 순간 가슴을 베는 선뜻한 칼날이 느껴져 입을 다물게 되는 그런 자리이다.

바로 그런 촌철살인의 순간에, 우리는 한때 철학자를 꿈꾸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대신에 작가의 길로 들어선 미셸 투르니에의 숨은 이력을 엿볼 수 있다. 이 책을 번역한 김정란 시인이 <개념의 거울(Le Miroir des Idees)>이라는 원제를 버리고 <소크라테스와 헤르만 헤세의 점심>이라는 다소 동떨어진 제목을 붙인 것도, 이러한 미셸 투르니에의 좌절된 철학자의 꿈을 고려한 것이었으리라.

하지만 나는 이 책의 성격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원제를 그대로 살리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되어, <소크라테스와 헤르만 헤세의 점심>이라는 새로운 제목이 조금 불만스러웠다. 다행히 2003년 같은 출판사에서 개정판을 내면서 책의 제목을 원제에 보다 가까운 <생각의 거울>로 바꾸었다고 한다. 아마도 나처럼 느꼈던 사람들이 제법 많았던 모양이다.

거울은 시계만큼이나 자주 철학적 성찰의 대상이 되어 온 오브제이다. 프랑스의 젊은 문화사학자 사빈 멜쉬오르 보네가 쓴 매력적인 책 <거울의 역사>에 의하면, 대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에게 거울을 자주 들여다보라고 했다고 한다. 거울은 '너 자신을 알라'의 보조자로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신격화하지 않도록 해주며, 자신의 한계를 알아서 자만에 빠지는 것을 피하도록 해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작가 미셸 투르니에의 '생각의 거울'은 그렇게 진지하고 무거운 윤리적ㆍ도덕적 소명과는 무관한 것들을 비추고 있어 들여다보기에 즐겁다. 남자와 여자, 웃음과 눈물, 동물과 식물, 유목민과 정착민, 태양과 달 등 마치 거울에 비춘 것처럼 우리의 의식 속에서 대립하고 있는 두 개의 개념을 짝 지은 57개의 쌍, 114개의 개념을 비춰 보여주고 있는 그의 '생각의 거울'에서 문학과 철학은 놀라울 정도로 잘 어울리고 또 서로 닮은 모습을 보여준다. 이처럼 거울 놀이를 통하여 철학과 문학의 결혼을 주선하는 이 책의 기획의도에 대해서 미셸 투르니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고립된 개념은 사색에 매끈한 표면을 제공하기 때문에 사색은 손을 댈 수가 없다. 그러나 반대 개념을 그 개념에 대치시키면, 그 개념은 파열되어 버리거나 투명해져서 그 내적 구조를 보여 준다. 문화는 문명에 대치시켜 보았을 때 비로소 그 파괴적인 힘을 드러낸다. 황소의 목은 말의 엉덩이의 의해서만 분명해진다. 스푼은 포크 덕택에 그 모성적인 부드러움을 보여 준다. 달은 환한 대낮에만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우리에게 이야기해 준다. (16쪽, '들어가는 말 : 114가지 개념 읽기')


과연 그렇다. '사랑'이라는 덧없는 열정에 지나치게 많은 것을 걸고 있는 현대 서구 문명의 취약성은 '우정'이라는 굳건한 토대에 비추어보아야만 비로소 느껴진다. 부유하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는 '주인'의 물질적 우월성은 '하인'이 지니고 있는 헌신, 성실함, 검소함 등 고결한 자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서로를 비추는 과정 속에서 뜻밖에 발견하게 되는 이러한 통찰들은 자잘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손가락으로 그걸 집어드는 순간, 그 만만치 않은 무게 때문에 놀라게 된다. 그 통찰들은 방대한 독서와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사유가 고도로 압축되어 있는 밀도 높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와 헤르만 헤세의 점심>을 읽으면서 독자인 우리가 저자 미셸 투르니에와 함께 즐기는 점심은 가볍지만 매우 배부른 것이다. 철학적 개념들에 흔히 붙어 있기 마련인 소화하기 어려운 지방질이 말끔히 가셔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싱싱하고 단백질 풍부한 영양식을 마련한 미셸 투르니에의 이 놀라운 요리 솜씨가 철학이 아니라 문학에 빚지고 있음은 두말 할 나위 없다.

3.

역자 김정란 시인이 말한 것처럼, 미셸 투르니에가 철학 전공 교수 자격 시험에 실패한 결과는 "철학자 한 명을 잃은 것보다 훨씬 더 나은 결과를 우리에게 가져다주었다. 투르니에의 작품은 철학 서적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고, 그리고 독자들은 훨씬 더 친절한 방식으로 철학에 접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이다.

미셸 투르니에는 니체나 사르트르 못지 않게 철학과 문학의 결혼을 훌륭하게 성취시킨 작가이자 동시에 철학자이다. 그의 주례사가 밀도 높은 철학적 통찰들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재미있고 유쾌하며 또한 길지 않다(결혼식장에 온 하객들에게는 이게 가장 결정적이리라)는 점에서는 니체나 사르트르보다 오히려 앞서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으리라. 그의 철학적 에세이 <소크라테스와 헤르만 헤세의 점심>은 바로 그런 책이다.

덧붙이는 글 | 소크라테스와 헤르만 헤세의 점심(Le Miroir des Idees)

ㅇ지은이 : 미셸 투르니에 (Michel Tournier)
ㅇ옮긴이 : 김정란 
ㅇ펴낸곳 : 도서출판 북라인      
ㅇ펴낸때 : 2000년 12월 26일 1판 3쇄
ㅇ정  가 : 7,000원   

* 이 책은 2003년 같은 출판사에서 <생각의 거울>이라는 제목으로 개정판을 냈습니다.


소크라테스와 헤르만 헤세의 점심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정란 옮김, 북라인(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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