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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년 3월 17일 새벽 사주측이 동원한 술 취한 폭도들에게 강제 축출되기 직전 동아일보사 편집국에서 마지막 '자유언론 만세'를 외치는 기자들과 사원들.
ⓒ 동아투위

박정희 유신독재 정권의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가 기업주들에게 압력을 가하여 <동아일보>에 '백지광고' 사건이 일어났고 뒤이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언론인 160여 명이 대량 강제해직 당하는 '언론유신' 사건이 일어난지도 올해로 31년째를 맞았다.

이른바 민주정부라고 일컬어지는 김영삼의 문민정부,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 노무현의 참여정부 등 3개 정부가 계속된 지난 15년 동안에도 동아의 '백지광고' 사건의 진상규명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동아>·<조선> 해직언론인들의 원상회복이나 동아·조선 사주들의 사과도 없었다.

박정희 중앙정보부의 소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정보원의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 사건을 조사 대상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이하 동아투위)는 새로 구성된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 진상규명 신청을 할 예정이다. 이번에는 어떻게 처리하는지 두 눈 부릅뜨고 지켜봐야 하겠다.

자유언론을 압살하고 독재권력과 야합했던 <동아>·<조선>의 위세가 이른바 민주정부의 진상조사 의지를 꺾을 만큼 아직도 대단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그 정부들의 의지가 별 볼 일 없는 수준이었던 것일까, 따져볼 일이다.

지난 2월 18일 토요일에는 동아투위의 막내 고 강정문 동지의 첫째딸 호선 양의 결혼식이 서울대 호암회관에서 있었다. 강 동지가 한창 일할 나이에 급작스레 세상을 뜬 뒤 현숙한 부인이 딸 셋을 잘 키워 첫째를 시집보내는 날이었다.

<동아> 수습 13기 강정문, 이미 수습기자 시절부터 대성할 인재로 꼽혔던 그가 거리로 쫓겨나서도 가장 꿋꿋하게 버텼으나 병마에는 견디지 못했다. 동아투위 113명의 동지들 가운데 강 동지를 비롯, 12명의 동료들이 유명을 달리했다. 언론계를 위해서 뿐 아니라 지식인 사회 전반을 위해 크게 쓰였을 강 동지 같은 인재들이 유신권력과 언론 권력에 의해 거리로 쫓겨나 한스런 세월을 살아오다가 일찍 세상을 뜨거나 혹은 아직 살아남아서 오늘도 '동아사태 진상규명'을 외치고 있다.

새벽에 깡패동원, 134명 언론인 내쫓고 강제해직

이미 한세대 31년이 지난 '동아사태'는 이 글을 읽을 새 세대들에게는 역사 속의 사건이다. 그러나 오늘의 이 나라 언론권력의 뿌리를 정확히 들여다보려면, 이 사건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며 불가피하다.

<동아> 사태는 1975년 3월 17일 <동아일보> 사주측이 박정희 유신독재에 반대하며 자유언론운동을 벌이던 134명의 동아일보-동아방송의 기자, 프로듀서와 아나운서, 엔지니어 등 언론인들을 깡패를 동원하여 폭력으로 거리로 내쫓고 해고시킨 사건을 말한다.

1974년 초 민청학련 사건을 계기로 민주화운동 세력에 대한 탄압의 고삐를 죄던 박정희 유신독재 권력은 연행·구속·고문·제적·해고 등 인권탄압과 생존권 박탈을 보도하려는 언론인들을 억압했다. 언론인들은 이중의 싸움을 벌여야했다. 편집국과 보도국에는 신문-방송담당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마감 시간 이전에 편집국장석과 보도국장석을 비롯한 주요부장석을 돌면서 문제될 기사들을 빼도록 압박하곤 했다.

문제는 청와대와 중앙정보부의 고위 당국자들이 언론 사주와 편집 고위 간부들에게 압력과 회유를 가해오면 아무리 기자들이 버텨도 기사들이 빠지거나 변질되는 일이었다. 이에 저항하는 간부나 일선 기자들은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모욕-구타당하거나 구속당했으며 사주는 편집국이나 보도국 소속 기자를 광고국 직원으로 발령내기도 했다.

시국관련 기사들 뿐만 아니라, 민생과 관련된 내용까지도 제재를 가했다. 봉천동 등 서울시내 달동네들에서 한 겨울에 벌어지곤 하던 연탄값 폭등사태를 보도하면 서민층 민심을 선동한다고 중정에 연행해다가 고문-구타를 자행했으며 박 정권 자신이 발표한 국가비상 사태와 10월유신 내용 가운데 '집회-결사-언론자유의 제한', '정당해산', '국회해산', '헌법기능 정지', '언론검열' 등을 1면 제목으로 뽑으면 "왜 자극적인 내용을 제목으로 뽑느냐"면서 중앙정보부나 보안사에 연행하여 무차별 구타하며 성기를 책상 위에 올려놓게 하고 "너 같은 종자 씨를 말려야 한다"면서 사무용 면도칼로 절단하겠다고 위협하는 등 테러를 가했다.

1969년의 3선 개헌, 71년의 국가비상사태 선포, 72년의 10월유신 선포, 74년의 긴급조치 등 박정희 유신독재 체재의 강화는 언론계 안에 세 가지 흐름을 형성시켰다. 첫째가 유신독재에 적극 협력-영합하는 흐름으로 유정회 국회의원이나 정부 각료 혹은 청와대 수석비서관을 비롯한 정부 각 부처의 대변인으로 진출하는 경우, 둘째가 언론계에 희망이 없어지니까 한창 팽창일로를 걷던 재계로 자리를 옮기거나 학계 혹은 외국 유학으로 떠나는 경우, 그리고 마지막으로 언론계에 남아 독재권력 및 사주권력과 맞서 싸우겠다는 - 주로 30세 전후의 - 젊은 언론인들의 경우로 나뉘었다.

71년 비상사태 선포 전후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동아일보> 사내의 언론자유수호운동은 72년의 유신체제 선포를 거치면서 숨결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정당한 기사의 보도요구, 삭제, 연행, 석방요구, 철야농성이 계속되었다. 사주측과의 갈등 마찰도 고조되어갔다. 언론자유운동에 앞장선 천관우 주필과 심재택 기자가 해임되는가 하면 기자들을 업무부서로 보임하는 등 서슬퍼런 유신독재 앞에서 언론인들의 신분은 폭풍 앞에 선 촛불 신세나 다름 없었다.

독재권력과 사주권력 앞에서 아무리 기자 개인이 유능하고 정의로와도 사실보도와 공정한 논평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언론인의 신분을 스스로 쟁취하고 언론자유의 영역을 스스로의 힘으로 확장하기 위해 <동아>의 기자, 프로듀서와 아나운서, 엔지니어들은 집단적 자위수단을 강구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이 언론 최초의 노동조합, <동아일보> 노조의 결성이었다. 1974년 3월 6일, 당시에는 언론노조가 없어서 출판노조 <동아일보> 지부(지부장 조학래 과학부 기자)의 형식을 빌었다. <동아> 사주측은 대량해고로 대응했지만 노조 집행부는 1차, 2차, 3차 집행부를 계속 구성하여 사주측의 해고를 자청하고 나섰다. 부당해고에 비난 여론이 들끓자, 불리함을 감지한 사주측이 부당해임을 철회하면서 노조측은 노조 결성을 기정사실화하고 노조의 조직을 확대하면서 유신권력과의 대회전을 준비했다.

▲ 1975년 강제 축출된 동아투위 위원들은 6개월 동안 출근시간에 회사 앞에 도열한 뒤 신문회관 혹은 종로 5가 기독교회관까지 침묵시위를 벌였다. 긴급조치 시대에 벌어진 기묘한 반정부침묵시위였다. 타개한 안종필 제2대 위원장과 강정문 동지의 모습이 보인다.
ⓒ 동아투위

광고주 협박 '백지광고' - 격려광고로 민주함성 메아리 쳐

<동아> 노조가 유신권력 및 사주권력과 사활을 건 투쟁을 벌이고 있는 동안, 1974년 벽두부터 언론 밖에서는 장준하-백기완 선생을 필두로 한 유신헌법에 대한 개헌청원 서명운동이 벌어지면서 긴급조치 1-2호가 발동돼 무차별 구속사태가 벌어졌고 곧 이어 종교인, 지식인, 전국의 대학생 등 1000여 명을 체포해 250여 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한 민청학련-인혁당 사건이 터졌다.

유신헌법 철폐운동이 서명운동의 형태이긴 했어도 광범한 대중운동의 형태로 전개되고 종교계, 지식인 사회, 그리고 전국의 대학생들이 들고 일어나자, 박정희 유신독재 정권은 인혁당이라는 공산당 조직이 배후에서 사주했다는 낡고 낡은 용공조작의 수법을 동원, 대대적인 탄압을 일삼았다. 사형, 무기징역, 15~20년 징역이 아무렇지도 않게 선고됐다.

이같은 야만적 폭정이 기승을 부리는데도 언론은 유신정권의 철저한 통제 아래 나눠주는 보도자료 만을 싣거나 방송하는 확성기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었다. <동아>의 기자들은 노조의 단단한 조직을 기반으로 차근차근 준비해 나갔다.

새로 취임한 기자협회 <동아일보> 분회 장윤환 지부장과 집행부가 노조와 긴밀한 협력 아래 성사시킨 1974년 10월 24일의 역사적인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의 선포가 그것이었다. 그 때까지 여러 차례 있었던 언론자유수호선언이 아니라 자유언론을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절대권력 유신독재에 대해서 절대로 타협없는 자유언론을 실천하겠다는 선언이었다.

1974년 자유언론 실천선언 전문

우리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처한 미증유의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언론의 자유로운 활동에 있음을 선언한다. 민주사회를 유지하고 자유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한 기본적인 사회 기능인 자유언론은 어떠한 구실로도 억압될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것임을 선언한다.

우리는 교회와 대학 등 언론계 밖에서 언론의 자유회복이 주장되고 언론의 각성이 촉구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 뼈아픈 부끄러움을 느낀다. 본질적으로 자유언론은 바로 우리 언론 종사자들 자신의 실천 과제일 뿐 당국에서 허용받거나 국민 대중이 찾아다 쥐어주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유언론에 역행하는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자유민주사회 존립의 기본 요건인 자유언론 실천에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을 선언하며 우리의 뜨거운 심장을 모아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1. 신문-방송-잡지에 대한 어떠한 외부 간섭도 우리의 일치된 단결로 강력히 배제한다.
1. 기관원의 출입을 엄격히 거부한다.
1. 언론인의 불법 연행을 일절 거부한다. 만약 어떠한 명목으로라도 불법 연행이 자행될 경우, 그가 귀사할 때까지 퇴근하지 않기로 한다.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사 기자 일동

이 귀중한 지면에 실천선언 전문을 인용하는 뜻은 이 선언이 갖는 무거운 비중 때문이다. 연행된 서울법대 교수가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받다가 고문으로 피살 당하고 수많은 종교인, 지식인, 대학생들이 대량 구속되어 사형, 무기, 15~20년 징역형을 무더기로 받으며 8명의 용공조작된 인혁당 사형수들이 대법원 판결 16시간 뒤에 사법 살인당하는 유신독재 정권의 테러, 공포 분위기 속에서 나온 문건이었다. 간결했지만 단호한 역사적 선언이었다.

<동아> 기자들의 실천선언은 전국의 거의 모든 신문·방송 매체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실천선언이 선포된 뒤에도 독재권력의 위협과 회유에 길들여져 온 사주와 고위간부들의 방해와 교란 행위가 끊이지 않았고, 기자들은 항의농성과 제작거부 등으로 맞서면서 제대로 된 신문과 방송 뉴스를 만들어 나갔다.

대학에서 벌어지는 민주화요구 시위, 성당 교회의 구속자를 위한 기도회, 문학인들의 표현의 자유를 요구하는 기고문 등이 실리기 시작했다. 미국·일본·유럽 등 세계언론이 동토를 뚫고 솟아오른 자유언론의 분출을 주목했다.

언론의 당연한 정상적인 보도활동이 해외언론의 취재대상이 되는 기묘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기자들과 함께 오래 전부터 프로그램 제작의 자유를 위해 노력해오던 <동아방송>의 프로듀서, 아나운서 등 방송 제작 사원들도 자유언론실천선언 현장에 다수 동참하고 적극적인 태도로 제작에 임했다. 그때까지 금기시되던 취재원을 과감히 찾아 나섰고 문제의 현장을 취재해 진실을 전하기 시작했다. 현장의 생생한 녹음 기록은 때때로 뉴스보다도 생생하고 강렬했다.

"동아! 너마저 무릎 꿇는다면 진짜로 이민 갈꺼야"

<동아> 젊은 언론인들의 결연한 자유언론 실천운동은 유신권력과 사주권력의 교란과 방해를 무릅쓰고 국민의 열화와 같은 지지 속에 민주화운동을 분출시켰다. 예견된 일이기는 했지만 반유신 국민운동으로 발전해가던 자유언론운동을 압살하기 위해 독재권력은 언론의 존립 근거를 밑뿌리부터 뒤엎어 버리는 희대의 수법을 동원했다. 중앙정보부 회심의 작품이었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전대미문의 광고 탄압이었다. 1974년 12월 16일부터의 일이었다. 광고주들이 하나 둘 신문의 광고 동판을 회수해 가기 시작했다. 일제 식민통치 아래서도, 자유당 독재정권 아래서도 상상하지 못했던 듣도 보도 못한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무더기 광고해약 사태가 본격적으로 밀어닥친 것은 12월 24일이었고, 25일에는 완전히 끊겼다. 저들은 <동아>에게 기막힌 성탄절 선물을 주었다고 조롱했을 것이다. <동아방송>에 대한 광고 탄압도 그해 12월 20일부터 시작되어 1월 11일에는 완전히 사라졌다.

<동아일보>는 광고가 전혀없는 흰 지면을 그대로 내보냈다. 그러자 삽시간에 흰 지면을 메우려는 '격려 광고'들이 몰려들었다. 종교계와 문인단체, 민주시민, 학생들, 주부들, 막일꾼 등 많은 독자 시민들의 격려광고들이 답지했다. 백지광고 지면은 민주시민들의 함성으로 메아리쳤고 한국의 민심의 소재가 어디에 있는지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었다.

"동아! 너마저 무릎 꿇는다면 진짜로 이민갈꺼야. - 이대 S생",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여백을 삽니다. - 밥집 아줌마", "나는 조용히 미치고 있다. - 어느 경북대 교수", "당당하게 버티는 거야. 도깨비는 날이 새면 허깨비가 되나니.- 동화작가"

<동아> 사태를 취재하기 위해 1월 14일 철야농성에 들어간 동아일보 기자들과 함께 하룻밤을 보낸 <워싱턴포스트>의 돈 오버도퍼 도쿄 지국장은 '한국신문의 유령의 적'이라는 제목으로 장문의 기사를 썼다.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 가운데 하나인 <동아일보>는 남한의 비밀경찰이라는 '유령의 적'과 생명을 걸고 싸우고 있다. 그해 12월 중순부터 주요 광고주들은 하나 둘씩 예정된 광고를 돌연 취소하더니 마침내 광고 취소 통고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12월 중순 광고해약 작전이 시작되자, <동아일보>의 광고란은 사시와 언론자유 슬로건이 한 쪽 구석에 실린 채 많은 지면이 백지로 드러났다. 이와 동시에 새로운 형태의 광고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자유언론을 격려하는 몇 줄 짜리 광고가 몰려들었다. 많은 광고가 보복의 위험 때문에 익명으로 났다. 그러나 용기 있고 현명한 격려 광고들은 삽시간에 국내의 화제가 되었다."

▲ 2005년 3월 1일 30년 만에 동아일보 옛 사옥 정문 앞에 다시 모인 동아투위 위원들이 "동아일보는 사죄하라! 원상복귀시켜라!"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 동아투위

<동아일보> <조선일보>의 사과-진상규명 더 이상 못 미뤄

그러나 본격적인 광고 탄압이 시작된 지 한 달이 경과할 무렵부터 <동아일보> 안팎에서 심상치 않은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동아일보> 사주측이 곧 권력과 타협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지면 제작과 방송 프로그램 제작에서 그대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선 격려 광고 내용을 신청자들의 바라는 바대로 내주지 않고 변질시켰으며, '인혁당'이라는 단어를 제목으로 뽑지도 못하게 했으며 '고문'이라는 단어 대신에 '가혹행위'라는 용어로 순화해서 쓰도록 강요했다.

1975년 2월 28일 열린 동아일보사 주주총회는 이사진을 대폭 교체하고 "1)일부 사원들의 거듭되는 사규문란 행동을 주시하면서 모든 방법을 다하여 조속히 사내의 질서와 기강을 확립할 것을 요망한다, 2) 경영의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 불요불급한 사업과 기구를 정비하고 기타 가능한 모든 수단을 강구하여 경영을 합리화할 것을 요구한다"고 결의했다.

우선 사주측은 1975년 3월 8일 '기구축소 해임'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심의실, 기획부, 과학부, 출판부 등 4개부 18명의 사원을 대량 학살의 첫 제물로 삼았다. 그 18명 가운데에는 <동아> 노조 지부장이자 자유언론운동의 핵심이었던 조학래 기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사주측도 어디가 뇌관인지 정확히 알고 조준사격을 가한 셈이었다.

즉시 <동아일보> 기자들과 <동아방송>의 방송인들은 제작 거부에 들어갔다. 당시 차장 이하 기자 188명 가운데 105명, <동아방송> 프로듀서 45명 가운데 34명, 아나운서 및 엔지니어 등 20명이 제작 거부에 참여했다. 사주측은 1975년 3월 17일 미명 술취한 깡패들을 동원, 부당한 해임에 항의하여 제작거부 농성중인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 엔지니어 등 150여 명의 사원들을 폭력배를 동원하여 거리로 몰아냈다.

이날 밤 함께 철야농성에 증인으로 참여했던 제임스 시노트 천주교신부와 AP통신의 홍건표 기자도 3층 편집국으로부터 끌려 나왔다. 회사 밖으로 끌려나간 동아 언론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들을 <동아일보> 사옥으로부터 멀리 밀어내는 경찰기동대들이었다.

6개월 동안 <동아일보> 앞에서 도열-시위행진

축출당한 <동아> 언론인들은 즉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를 구성하고 초대 위원장에 권영자 기자(문화부 차장)를 추대했다. 동아투위 위원들은 매일 아침 출근시간에 <동아일보> 정문 앞에 도열하여, 출근하는 제작참여 사원들에게 유인물을 배부하고, 도열이 끝나면 신문회관(현 프레스센터)까지 행진했다. 서슬퍼런 긴급조치 시대에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서 매일 아침마다 아슬아슬한 시위행진이 6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동아일보>, <동아방송>에서 숨막히는 싸움이 진행되고 있던 거의 비슷한 시기에 길 건너 <조선일보>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주측이 깡패를 동원하여 자유언론운동에 앞장섰던 기자 33명을 회사 밖으로 강제 축출했다. <조선> 기자들도 <동아>측과 마찬가지로 정태기 기자를 위원장으로 하여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구성했다. <동아> <조선> 투위는 그 이후 함께 의지하며 고달픈 시대의 동행자가 되었다.

<동아일보>에 광고가 언제 다시 나타나는가는 시간 문제였다. 자유언론 운동에 앞장선 언론인들을 내쫓고 지면을, 방송내용을 변질시키고 유신권력의 시책에 추종하는 이상, 유신권력과 동아사주권력의 밀월이 미뤄질 아무런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1975년 7월 16일 제약회사 광고를 시발로 광고가 정상화되었다. 아무런 해명도 없었다. 1975년 6월까지 확정된 동아투위 위원들에 대한 사주측의 인사 조치는 해임 134명이었다. 그뒤 몇 년 간에 걸쳐 일부 투위원들이 사주측과 개별적 접촉을 통해 복귀해 31년이 지난 현재의 동아투위원 숫자는 113명이다. 이들 가운데 안종필 제2대 위원장을 비롯, 12명이 세상을 떠났다. 또한 동아투위원들 가운데 13명이 자유언론 쟁취운동과 관련해서, 혹은 갖가지 치열한 민주 통일운동에 연루되어 적게는 한 차례에서 다섯 차례까지 감옥살이를 치러야 했다. 경찰서 유치장에 1주일에서 15일 정도까지 갇히는 구류 처분이나 연행은 너무 많은 투위위원들이 겪어서 헤아릴 길도 없다.

동아투위 12명 세상을 떠나고, 13명은 징역살이

동아투위는 유신독재의 어둠이 칡흑처럼 뒤덮이고 자신들의 원상복귀의 가능성도 암담할 뿐 아니라 연배에 있어서도 재야의 종교, 법조, 학계, 문화예술계 지도자들과 청년학생 지도자들 사이에서 중간 집단으로 역할할 것이 요구되자, 1970년대 말부터 연결적 기능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78년의 인권운동협의회, 79년부터 80년 '서울의 봄' 기간 동안의 연대운동, 신군부 집권기인 80년대 동안 민주화운동의 구심 역할을 한 민중민주운동협의회(민민협),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의 창립과 활동에 동아투위 위원들은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동아투위 위원들 가운데 여러 사람이 70년대 중반부터 출판계에 뛰어들어 독재체제의 일부가 된 제도언론에 맞서 민주적 전망을 제시하는 사회과학 서적들을 출판하여 새로운 출판문화운동, '제2의 자유언론운동'을 개척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의미있는 시도는 <한겨레신문> 창간으로 나타났다. <동아> <조선>으로 부터 축출당한 지 12년만에 그 해직언론인들이 80년도 신군부에 의해 해직된 후배 언론인들과 힘을 합쳐 국민주를 통해 국민성금을 모아내서 새 신문을 탄생시킨 것이다.

대량 강제해직, 생활고 , 미행 감시, 취업 방해, 구속과 징역살이, 가족들의 고통 속에서 이들은 담금질을 당했으며 자유언론운동,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헌신함으로써 언론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보람과 기쁨도 맛보았다. 고통과 보람의 세월 30여년을 동지들과 함께 지내오면서 겸손하면서도 당당한 민주시민의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정말 꼭 해야 할 일이 남아있다. 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지난 1975년에 박정희 유신독재 권력과 야합하여 내쫓은 언론인들을 원상회복시키지 않으며 사과 한마디도 하지 않는가. 그리고 무슨 낯으로 언론자유의 기수를 자처하며 부끄럼없이 왜곡을 일삼는가.

▲ 이부영
더욱이 이른바 민주 개혁정부를 자처하는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역대 정부들은 왜 '동아 백지광고 탄압' 사건과 <동아> <조선>의 언론인 대량해직 사태의 진상을 규명할 생각도 하지 않았는가. 동아투위는 국정원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가 이 사건을 조사대상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면서, 새로 발족한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 조사를 정식으로 신청할 것이다. 그리고 지켜볼 것이다. 거짓이 진실을 덮어버리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 긴 글을 인내심있게 읽어주신 누리꾼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덧붙이는 글 | 유신시대 언론상황을 더 깊이 아시고자 하는 독자들께서는 2005년 해담솔에서 출간한 <자유언론 - 1975~2005 동아투위 30년 발자취>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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