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러시아는 북한·미국·중국·일본 등의 적극적인 행보에 가려 동북아의 뉴스 초점에서 벗어나 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그러나 동북아 정세에 있어서 러시아는 여전히 중요한 행위자이며, 한반도의 향후 정세를 예측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행동 패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러시아의 한반도 외교 패턴을 이해하기 위해, 러시아가 동북아에 본격 등장한 19세기말의 상황을 살펴보기로 한다. 물론 지금의 러시아가 그때와 똑같은 행동패턴을 갖고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초기에 보인 행동패턴은 러시아 외교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참고가 될 것이다.
러시아가 동북아의 주요 행위자로 등장한 때는 1860년 중·러 베이징조약이다. 이때 러시아는 연해주를 차지함으로써 만주와 중원을 위협할 수 있는 전략적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그리고 러시아가 조선에 진출한 것은 갑신정변 3개월 전인 1884년 7월7일이었다.
러시아의 조선 진출은 러시아측의 자체 의지에 기인한 측면도 있지만, 이것은 무엇보다도 당시 고종의 적극적인 노력의 결과이기도 했다. 고종이 러시아를 끌어들이게 된 것은 청나라를 견제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한중관계는 상호간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관계였지만, 이 관계는 임오군란(1882년)을 계기로 파탄을 보게 되었다. 학계의 통설에 따르면, 청나라는 임오군란 진압을 계기로 종래의 한중관계에 없었던 강도 높은 내정간섭정책을 취하기 시작했다.
청나라의 내정간섭을 물리치기 위해서 고종은 처음에는 미국에 접근하였다. 하지만, 미국이 거절하자, 고종은 그 다음 카드로 러시아를 선택했다. 이렇게 하여 조선과 러시아는 1884년 7월7일 조러수호통상조약(조선과 러시아의 기본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을 계기로, 러시아는 사상 최초로 한반도 진출에 성공하게 되었다.
갑신정변 직전에 러시아 한반도 진출 성공
당시 러시아의 한반도 진출은 국제적 긴장을 고조시키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러시아가 연해주에 진출한 이후로 동북아에서 러시아 공포증이 유행하고 있던 차에, 그 러시아가 조선에까지 진출하자 청나라·일본 같은 주변국들은 물론 영국·미국 등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러시아 견제’라는 대의명분 하에 동북아 주요 국가들은 단결하기 시작했다. 갑신정변 당시 일본이 청나라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이유 중 하나도 바로 러시아 견제 때문이었다. 갑신정변 수습책의 일환으로, 청나라와 일본은 러시아 견제를 목적으로 1885년 톈진조약을 체결하고 연대를 도모했다. 그리고 영국 역시 러시아 견제를 위해서 1885년부터 2년간 거문도를 점령했다.
이 시기에 조선과 러시아는 2차례의 밀약을 통해 관계 밀착을 꾀하였지만, 원세개(위안스카이)와 친청파(親淸派)의 견제에 막혀 번번이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자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견제가 심해지자, 러시아는 1886년 청나라와 톈진협약을 체결하고 한반도에서 사실상 발을 떼는 모양새를 취했다. 이때 러시아는 ‘필요한 경우에는 일본과도 협력하면서 한반도에서는 가급적 소극적 태도를 취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리고 러시아는 1891년 내부 특별회의에서 ‘당분간은 시베리아횡단철도 건설에 주력’하기로 하였다.
견제 심해지자, 한반도에서 발을 떼
한편, 일본은 라이벌인 청나라와 러시아를 모두 꺾기 위해서 188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인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그리고 일본은 동학혁명(1894년)을 빌미로 청일전쟁을 도발하였다. 청일전쟁 직전에 조선은 러시아와 미국 등에 도움을 구했지만, 두 나라는 조선의 간곡한 부탁을 모두 외면했다.
그런데 청일전쟁 이후에 일본이 만주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자 러시아는 소위 삼국간섭(1895년)을 주도하면서 영향력 강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자국이 중국의 뤼순·다렌을 조차하고 조선에서는 일본과 세력균형을 유지하는 선에서 러시아는 타협을 보고 말았다.
그러다가 1897년 독일의 교주만 점령을 계기로 러시아에 대한 견제가 심해지자, 러시아는 결국 한반도를 완전히 포기하고 말았다. 이 틈을 타서 일본이 한반도를 완전 독점하고 이를 발판으로 러일전쟁 승리까지 쟁취하게 되었다.
초기 한반도 외교의 2대 특징은 소극성과 근시안성
지금까지 살펴본 것이 19세기말 러시아가 한반도에서 보여 준 외교적 행태다. 이 시기 러시아의 한반도 외교에서 나타난 주요 특징으로는 소극성과 장기 전략의 부재(근시안성)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특징은 소극성이다. 당시 고종은 김옥균 등을 파견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조·러 수교를 요청하였지만, 러시아는 수교에 이르기까지 2년 정도의 시간을 경과했다. 그동안 국제사회의 분위기를 탐지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거문도 점령이나 청일전쟁 시기에도, 상황을 주도하기보다는 상대방의 반응을 탐지하는 데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러시아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극동정책을 수행할 만한 경제적 능력이 취약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러시아는 시베리아횡단철도 완성으로 경제적 기반이 마련된 이후에 본격 행동을 취하려고 계획했던 것이다.
두 번째 특징은 장기 전략의 부재다. 러시아가 동북아에서 장기 전략을 세우지 못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한 가지는 동북아 지역에 대한 정보의 부족이다. 또 한 가지는 동북아 정책이 주로 현지 책임자에 의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한반도정책은 주로 동북아의 현지 책임자들에서 의해서 결정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처럼 정책 결정에 충분한 자원이 투입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정책의 질도 자연히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격월간 시사지 <뉴스매거진> 최근호에 기고한 내용을 수정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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