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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의 삶을 살도록 운명지어진 이름

▲ 시인 손세실리아 첫 시집 <기차를 놓치다>
ⓒ 애지
"인천공항을 출발한지 사흘만에 바라나시에 도착했다. 본능적으로 가트 왼편을 타고 뛰었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화구 즐비한 갠지스강 버닝가트(화장터)가 나왔다. 거기, 잘 마른 장작더미를 쌓고 유년의 상처를 모셨다. 불, 지펴드렸다" -'시인의 말' 몇 토막

지난 2001년 계간 <사람의 문학>에 시 '다시 일산에서', '마두광천탕', '사랑아 다음 생에 우리 만나거든'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한 시인 손세실리아(43)가 첫 시집 <기차를 놓치다>(애지)를 펴냈다.

제1부 '황홀한 광경'에 실린 '얼음호수', '좆 같은 세상', '곰국 끓이던 날', '한라산', 제2부 '가혹한 쓸쓸함'에 실린 '갠지스강, 화장터', '늙은 호박', '시를 버리다', '살을 섞는 일이란', 제3부 '숨겨둔 사랑'에 실린 '까막눈', '베옷을 입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욕', 제4부 '오래된 상처'에 실린 '고봉산 뼈무덤', '저문 산에 꽃등 하나 내걸다'등 56편이 그것.

이 시집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방민호는 "손 세실리아라는 이름은 시인인 그녀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음악의 수호성인이라는 세실리아 성녀를 '닮은' 영혼의 삶을 살도록 운명지어져 버린 것 같은 느낌을 선사한다"라며, "그래서 그녀는 시인이 되어야 했던 것일까"라는 물음표를 툭 던진다.

24시간 목욕탕에 삶아도 죽지 않은 성녀 세실리아

새벽, 영등포역

지하도에 내몰린 딱한 사내와
쫓겨난 비렁뱅이 계집이 눈 맞았는데
기어들어 녹슨 나사 조였다 풀
지상의 쪽방 한 칸 없구나
달 뜨고 애태우다
제풀에 지쳐 잠든 사내 품에
갈라지고 엉킨 염색모 파묻은
계집도 따라 잠이 들고

살 한 점 섞지 않고도
이불이 되어 포개지는
완벽한 체위를 훔쳐보다가
첫 기차를 놓치고 말았다

고단한 이마를 짚고 일어서는
희붐한 빛
저 철없는 아침

-12~13쪽, '기차를 놓치다' 몇 토막


세실리아... 시인 손세실리아의 이름인 '세실리아'는 음악의 수호성인 성녀 세실리아에서 따온 세례명임에 분명하다. 자료에 따르면 세실리아는 자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 발레리아누스(Valerianus)와 결혼했으나, 남편으로 하여금 자신의 동정을 존중해 주도록 만들었고, 마침내 남편과 남편의 동생 성 티부르티우스(Tibrutius)까지 그리스도인으로 개종시킨 성녀이다.

하지만 남편과 남편의 동생은 로마병정에게 끌려가 죽임을 당하게 되고, 세실리아 또한 사형을 받게 된다. 그 당시 사형 풍습은 사람을 목욕탕에 가두어놓고 쪄서 죽이는 가혹한 형벌이었다. 하지만 세실리아가 24시간이 지나도록 죽지 않자 로마병정들은 결국 그녀의 목을 베어 죽인 뒤 땅에 묻었는데, 수년이 지나도록 그 시신이 썩지 않았다고 한다.

근데, 왜 한 시인의 시집을 꺼내놓고 뜬금없이 세실리아란 이름에 얽힌 이야기를 길게 들먹거리느냐고? 그 이유는 시인 손세실리아의 시집을 읽기 전에 시인의 세례명인 세실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알아야 시에 담긴 속내가 하나 둘 드러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에 펴낸 손세실리아의 첫 시집은 그 자신의 정체성 찾기라고도 할 수 있다.

제목이 된 '기차를 놓치다'란 시에 나오는 "살 한 점 섞지 않고도/ 이불이 되어 포개지는/ 완벽한 체위" 또한 마찬가지다. 시인 손세실리아는 이른 새벽, 영등포역에서 "제풀에 지쳐 잠든" 빈털터리 사내와 그 사내의 품에서 편안하게 잠든 비렁뱅이 계집의 모습에서 성녀 세실리아의 완전한 사랑(자신의 동정을 존중해주도록 만든 남편)을 느끼는 것이다.

어머니의 삶이 곧 성녀 세실리아의 삶

그랬구나
평생 장승처럼 눕지도 않고 피붙이 지켜온 어머니
저렇듯 온전했던 한 생을
나 식빵 속처럼 파먹고 살아온 거였구나
그 불면의 충혈된 동공까지도 나 쪼아먹고 살았구나
뼛속까지 갉아먹고도 모자라
한 방울 수액까지 짜내 목축이며 살아왔구나
희멀건 국물,
엄마의 뿌우연 눈물이었구나

-28~29쪽, '곰국 끓이던 날' 몇 토막


시인 손세실리아는 "노모의 칠순잔치 부조 고맙다"라며 후배가 사온 사골 세트를 "도막난 뼈에서 기름을 발라내고" 고기 시작한다. 그렇게 하루 반나절을 고고 또 고았지만 이상하게 뽀오얀 국물이 우러나지 않고 희멀겋기만 하다. 시인은 하도 이상해서 가까운 단골 정육점에 가서 왜 텁텁한 국물이 우러나지 않느냐고 묻는다.

시련 속에서 구원의 길을 찾아내는 시인
시인 손세실리아는 누구인가?

▲ 시인 손세실리아
ⓒ애지
"집 근처에 호수가 있다. 애인보다 더 살가운 호수를 끼고 지내면서도 갠지스강을 향한 태생적 그리움은 어찌된 영문인지 희석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갈수록 오히려 간절해졌다. 홀로 이행해야 할 의식이 있었기 때문일까? 지난 여름, 눈 딱 감고 인도로 날아갔다." -'시인의 말' 몇 토막

시인 손세실리아는 1963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2001년 계간 <사람의 문학>에 "다시 일산에서" 등 4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사회운동에 비로소 눈을 떴다"고 고백하고 있는 시인은 '얼음호수', '고장난 문', '말복' 등의 시에서 생명은 가혹한 시련을 견뎌내야 하는 힘겨운 존재이지만 그 시련을 견뎌냄으로써 새로운 구원의 길이 열린다고 믿고 있다.
/ 이종찬 기자
정육점 주인이 말하기를 그 소뼈는 암소의 뼈이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한다. 암소가 "새끼를 몇 배 낳아 젖 빨리다 보니/ 몸피는 밭아 야위고 육질은 질겨져"서 그렇단다. 게다가 암소의 뼈는 고기 값도 "황소 절반밖에 안 되고/ 뼈도 구멍이 숭숭 뚫려 우러날 게 없"다고 귀띔한다.

시인은 아프다. 갑자기 가슴이 알알이 저려온다. 뽀오얀 국물이 우러나지 않는 그 소뼈가 마치 자식들에게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 껍데기와 뼈만 앙상하게 남은 어머니의 몸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 소뼈에서 우러난 희멀건 국물이 마치 "엄마의 뿌연 눈물"처럼 시인의 가슴 저 깊은 곳에서 보글보글 끓어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한나절 반을 고아도 뽀얀 국물이 우러나지 않는 암소의 뼈는 성녀 세실리아를 떠올리게 한다. 세실리아를 목욕탕에 가두어놓고 24시간 이상 쪄도 결코 죽지 않았던 성녀 세실리아. 그래. 시인은 어쩌면 이 시에서 성녀 세실리아의 거룩한 삶을 어머니의 조건 없는 자식 사랑에 빗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희로애락 희롱하는 비움의 시학

"퇴화된 날개죽지가
축 처져 녹아내리는 냉동 닭을 손질한다
움츠린 허벅지 사이
말끔히 지워져버린 수태의 흔적
저 아득함이라니
지상의 어떤 양식으로도
결코 메워지지지 않는 썰물이다, 공터다

-52쪽, '말복' 몇 토막


여름이 끝난다는 말복. 시인은 복날 음식으로 냉동 닭을 손질한다. 태어날 때부터 닭장에 갇혀 날갯죽지마저 아예 퇴화되어버린 그 냉동 닭에서 시인은 수태의 흔적마저 사라져버린 사실에 대해 깊은 슬픔을 느낀다. 갑자기 가슴 밑바닥에 가득 차 있던 밀물이 쏴아 하고 밀려나가면서 갯벌도 없는 빈 공터만 휑하니 남아있는 것만 같다.

시인은 냉동 닭의 움츠린 허벅지 사이에서 "한 존재를 내려놓고 통과해낸/ 지난 세월이 저러했던가/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아/ 그리도 깊고 오랜 절망으로 휘청거렸던가'라며, 가혹한 쓸쓸함을 느낀다. 성녀 세실리아의 삶도 이러했을까. 성녀 세실리아도 냉동 닭처럼 "말끔히 지워져버린 수태의 흔적"을 안고 아득함 속으로 떠나갔을까.

시인 손세실리아의 시편 곳곳에는 끝없는 희생과 비움의 시학이 자리 잡고 있다. 그 희생과 비움 속에서 시인은 새로운 희망과 구원의 길을 찾아내고 있다. "먹어도 먹어도 허리가 줄고 시시로/ 목이 멥니다 마음과 몸이 삐걱대고 번번이 서로 거역합니다"(마흔)라거나, "몸 안의 무수한 길 지워내고/ 불생불멸의 경지에 드셨다"(별) 등이 그러하다.

손세실리아에게 있어서 비움은 희로애락에 대한 희롱이자 아름다움이며 영원이다. "누군가에게 길을 터주는 일이란/ 저토록 말끔히 자신을 비워내는 일임을"(봉안타널)이나, "문을 연다, 저렇듯 환한/ 開(개)!/ 문을 닫는다, 이렇듯 완고한/ 閉!(폐)"(고장난 문)나,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란 저렇듯/ 헐거워진 삭신까지도 버혀낸/ 가이 없는 보시임을 안다"(다비식)도 마찬가지다.

"내 안의 오래된 상처도
푸르고 곱게 부식되어
다음 생엔 부디
이마 말간 꽃으로 환생하시기를
삼가 합장 또 합장하며
저문 산에 꽃등 하나 내걸고 내려옵니다

-105쪽, '저문 산에 꽃등 하나 내걸다' 몇 토막


<기차를 놓치다>는 춥고 캄캄한 이 세상의 고달픈 삶과 따스하고 찬란한 구원의 세상을 이어주는 수평선이다. 이 시집은 찬란하게 빛나는 희망의 세상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춥고 캄캄한 삶의 결을 거쳐야 하며,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이 세상에 다 내어주어야만 불생불멸의 경지에 닿을 수 있다는 비움의 시학을 건넨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SBS U포터 뉴스', <시민의 신문>에도 보냅니다.


기차를 놓치다

손세실리아 지음, 애지(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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